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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2월 27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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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렇게 서로 대립되는 평가를 더 깊게 들여다보면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의 증가와 기대의 상승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특히 한국 영화는 외국영화만 못하고, 돈 내고 보는 게 아깝다는 불평을 십여년 전만 해도 쉽게 접하던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한국영화 활력 올해도 대단▼
올해에도 지난해에 이어 한국 영화는 대단한 활력을 보여주었다. 일단 규모 면에서 아주 큰 영화인 한국형 블록버스터 ‘공동경비구역 JSA’의 ‘쉬리’를 이은 성공, 단편을 옴니버스 스타일로 엮은 작은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류승완의 등장은 시스템 밖으로부터 나온 신선한 자극이었다.
새 천년 영화 세상의 테크놀로지 변화도 올해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봉자’와 ‘눈물’ 같은 디지털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됐고 디지털―인터넷 전문 영화제가 열렸는가 하면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디지털 영화 섹션을 만들거나 디지털 영화들을 선보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단번에 한국의 타란티노가 된 류승완의 ‘다찌마와리’는 인터넷에서 풀타임 버전으로 상영돼 네티즌들의 호평을 받을 정도로 영화 제작과 배급 상영의 테크놀로지 혁신이 한쪽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다.
칸영화제 본선에 최초로 한국 영화 ‘춘향뎐’이 출품되는 성과도 있었다. 마치 칸 본선 진출이 한국 영화의 원대한 야심이자 성취인 양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었던 일이 떨떠름하긴 했지만 어쨌든 해외에서도 한국 영화의 존재와 활력을 인정하는 분위기는 올해 좀 더 확실해졌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상급 영화 비평지 ‘포지티프’에서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에 이어 ‘춘향뎐’ 스틸 사진을 표지에 싣고 한국 영화 특집을 다루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영화는 남녀 애정담에 대한 과잉 집착과 일상적 삶을 깊은 성찰의 시선으로 파고드는 이미지의 사유력에서 정상급 세계 영화들과 견주는데 한계를 보여주었다. 특히 같은 아시아권인 중국과 대만, 일본 영화들이 올해 달성한 성취와 비교해 보면 그런 점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또한 올해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개념이 정착되고 있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났다. ‘공동경비구역 JSA’ ‘리베라메’ ‘비천무’ ‘단적비연수’가 그런 영화들인데, 이들 중 ‘비천무’와 ‘단적비연수’는 막대한 제작비 투자와 장대한 스케일을 못 채우는 이야기체의 허술함과 캐릭터의 단조로움으로 규모만 키운 영화의 치명적인 결함을 폭로한다.
올 여름 줄줄이 나왔던 유사한 유형의 공포 영화들은 한국 영화의 악몽이기도 했다. 잘 나가는 한국 영화의 자신감이 불현듯 그 베일을 벗는 공포스러운 순간을 목격하는 기분이었다.미국 공포 영화의 컨벤션 베끼기, 일상으로부터 붕 떠버린 공포를 위한 어설픈 공포 효과, 이야기가 안되는 것이 스타일이라고 우기는 억지까지 골고루 갖춘 한철 공포 영화의 집단적 악몽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특히 올해 한국 영화에서는 젠더라는 화두를 제대로 돌파해 내지 못한 퇴행성이 아쉽게 느껴진다. 올해 선보인 외화들―‘로망스’ ‘포르노그래픽 어페어’ ‘에나벨 청 스토리’, ‘처음 만나는 자유’ 등―이 워낙 새 천년 영화 화두로 과감한 젠더 전략을 보여줘서인지 여전히 남성 판타지 속의 여성 이미지로 눈요기 장사를 하려는 한국 영화의 억압적 젠더 전략은 더욱 숨막혀 보인다.
▼소재의 한계 아쉬워▼
‘공동경비구역 JSA’가 제시한 남북화해 시대의 새로운 북한 이미지, ‘반칙왕’ ‘오! 수정’ 등이 보여준 블랙 유머적인 일상에 대한 성찰력, ‘춘향뎐’이 시도한 판소리의 영화 서사 가능성, ‘박하사탕’이 되새김질하는 현재에 각인된 과거의 의미, 개인과 사회의 관계, ‘동감’과 ‘시월애’ 등 멜로드라마가 보여준 색다른 애정담론은 과거 컨벤션을 벗어나기도 했다. 젊은 피의 활력으로 돌아가는 한국 영화에서는 어린이와 중장년층 관객을 배제한 소재의 한계와 일상에 영감을 주는 영화들이 충분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이탈과 탈주, 폭력과 애정담도 좋지만 열심히 진지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다채로운 영화, 한국 사회의 억압과 문제를 파헤치는 영화가 새해에는 좀더 나오기를 기대한다.
유지나(동국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