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황순원 발자취]詩처럼…鶴처럼…고고했던 한평생

입력 2000-09-14 18:34수정 2009-09-22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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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황순원씨
“연초에 제자들이 세배를 가려했는데 유독 오지 말라시며 대신 밖에서 저녁을 사셨지. 지금 생각하니 무슨 예감이 드신 모양이에요” 소설가 황순원(黃順元)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에는 15일 작가 조해일(趙海一) 이문구(李文求) 김원일(金源一)등 제자와 문단후배들이 모여 평생을 고고하게 살다간 고인을 기리며 추억에 젖었다.

추석 연휴 마지막날인 13일 밤, 노작가는 “미열기가 있다”면서 해열제 한 알을 복용하고 자리에 누웠다.

14일 아침, 부인이 아침상을 들고 방문을 열었을 때 노작가는 평온하게 누워 있었다. 작품에서나 생활에서나 절제로 일관했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산중 재학시절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의 단아한 풍채와 인품에 매료돼 ‘남자가 늙어서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라고 탄복했던 그였다.

단편 ‘소나기’로 대표되는 정련된 문체처럼 황순원은 결벽에 가까운 생활태도를 실천했다. 시와 소설 외의 글은 한번도 쓰지 않았으며 제자들의 작품에 서문이나 발문을 쓰는 것조차 거부했다.

작품 이외의 일로 언론에 알려지는 일도 피해 왔다. 95년 ‘사진을 찍지 않는다’ 등의 조건을 걸고 모처럼 ‘작가세계’와 인터뷰할 정도였다.

경희대 재직 시절 대학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했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술을 좋아했으나 한번도 술로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그는 73년 타계한 번역문학가 원응서에게 ‘마지막 잔’을 바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절친하던 원씨가 세상을 뜨자 그는 어느 술자리에서건 마지막 잔은 “응서, 자네 것이네”라고 산사람 대하듯 하며 빈 그릇에 쏟아 붓곤 했다.

그의 결벽적인 태도는 작품에 대해 유별났다. 토씨 하나도 바꾸어 쓸 수 없을 정도로 치밀했던 그의 문체는 플로베르의 ‘일사일어론(一事一語論)’에 비유되곤 했다.

이미 발표된 시집에 수록된 시의 절반을 ‘폐기’한 뒤 “없앤 작품은 절대 훗날에도 거론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며 노령에도 초교에서 재교까지 직접 체크했다.

고 김동리(金東里)는 “소나기 속에서도 비를 맞지 않고 가는 사람”이라고 농을 했으나 본인은 이런 평가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으나 결코 인정에 끌리지 않았다.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도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문하에서는 소설가 전상국 조세희 조해일 김용성 한수산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시인 박리도 이성부 정호승, 방송작가 신봉승 김정수, 수필가 서정범 등이 배출됐다. ‘제자 군단’은 80년대부터 스승을 모시고 ‘보신탕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져왔다. 이호철 서기원 최인호 김지원 김채원씨 등은 그의 추천을 거쳐 데뷔했다. 작가 전상국(全商國)은 “지난 연말 제자들이 세배를 가려 했는데 스승이 오지 말라시며 대신 불러 저녁을 사셨다”고 말했다.

그의 그늘 아래서 자라난 우뚝한 문인 중에 장남 동규씨(시인·서울대 교수)도 빼놓을 수 없다. 58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데뷔한 그는 왕성한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 동규씨는 “조용히 가셨으니 다행”이라는 주변의 위로에도 “그만 임종을 못했다”며 애통해 했다.

문학평론가 김병익(金炳翼)은 “황순원은 1930년대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단아하고 정갈한 문체로 인간의 심오한 내면을 드러냈으며, 이를 통해 소설 작법의 가장 중요한 본보기를 보여주었다”고 추모했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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