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前중앙박물관장이 말하는 '나의 아버지 정인보'

  • 입력 2000년 7월 17일 18시 39분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1893∼?).일제시대 조국 독립에 헌신하면서 국학을 부흥시켰던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

문화관광부는 위당의 민족정신과 학문세계를 기리기 위해 그를 ‘7월의 문화인물’로 지정했다.

중앙대 인문학연구소와 동아일보는 21일 서울 중앙대에서 학술세미나 ‘위당 정인보의 학문과 사상’을 마련한다.

한국 도자기 연구로 아버지의 겨레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위당의 막내아들 정양모 전국립중앙박물관장의 기고를 통해 위당의 학문과 사상을 되새겨 본다.<편집자>

나는 아버님에 대해 말씀 드릴 주제가 되지 못한다. 그 어른은 누구나 우러러 존경하는 선비이시고 학문이 드높고 깊고 넓으니 다만 아버님과 함께 했던 17년, 너무나 아쉽고 서럽고 애틋한 어릴 적 마음의 한자락을 적어 볼까 한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초까지 살았던 서울 내수동 집은 18칸쯤 되는 집이고 열세식구가 함께 살았지만 사랑채 안채가 있고 뒤에 사당채가 있었다. 아버님은 늘 사랑에서 책을 읽으시거나 혹 손님과 담소를 나누시고 안에 드나드시는 일이 드물었다. 사랑방에는 천장까지 책으로 그득하였고 아랫목에는 자그마한 서안(書案)과 연상(硯床)이 있고 한쪽으로 문갑이 보였다.

2차대전이 차츰 격화되자 창동으로 이사했고 사랑에는 언제나처럼 아랫목에 요가 깔려있고 머리맡에는 약봉지와 약병이 있었다. 밖에 누가 오는 인기척이 있어 낯선 사람이면 이불을 덥고 누우셨다. 방안에 매화 두세분을 키우셨는데 이른봄 매화 몇송이가 피면 “얘야 매화 향기 나느냐?” 가만가만 물으시던 모습이 선하다.

밤에는 고하 송진우선생 댁에 자주 가시고 벽초 홍명희와 가인 김병로 선생도 만나셨다. 전쟁은 더 격화되고 왜인들이 애국지사를 암살하려 한다는 급한 전갈이 있자 윤석오 선생이 일제의 핍박을 각오하고 아버님을 은밀히 익산으로 모셔 우리는 산중에서 살았다. 1945년 일제가 항복하고 서울로 돌아가야 했지만 서울에 집 한 칸이 없어 익산에 그대로 머물다가 아버님은 먼저 서울로 떠나셨다. 흑석동에 적산 가옥 하나를 임대해서 광복후 1년이 다 되어 이사를 했고 다시 남산동 적산가옥으로 이사했다.

남산동에 오셔선 “참 좋다. 감개무량하다”하셨다. 남산동은 정씨네 대소가가 함께 살았으며 아버님도 이곳에서 자라셨다고 한다. 혼자 사랑에 계실 때 마루를 지나면 글 읽으시는 맑고 낭낭한 음성과 운율의 흐름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지금도 내 가슴에 그득하다.

밖에서는 아버님을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그분의 말씀 한 마디가 추상같다고 하였다. 집안에서도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 우애하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며 거짓없이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나이가 들수록 그 어른이 사람의 도리를 지킴에는 엄격하셨지만 다정다감하고 애정이 넘치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남산동 집에서는 중학생인데도 내 뺨에 당신 턱을 비비시며 “따가우냐?” 하시기도 하고 “업어보자 걸음마 씩씩하다” 하시던 아버님이셨다.

아버님은 국문학 국어학 국사 동양사 한국사상 동양사상 한문학 불경 등 국학 전반에 걸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나라의 큰 스승이라고 들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나라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분명한 목표와 주관을 갖고 평생을 아무도 모르게 나라 사랑을 실천하신 점일 것이다.

평생 나라와 겨레 사랑을 실천하시고 국학진흥에 바치셨건만 1950년 북한군에 비참하게 끌려가시다 함경도 어디에선가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 측측할 뿐이다.

30만∼40만 명의 모든 강제 납북자 가족과 함께 바람 편에라도 안부 한 자 들을 수 없는 이 기막힌 서러움을 어찌하리오. 혹 이 다음에 내 생명이 붙어 있는 날, 복쪽 어디엔가 있을 수도 있는 아버님 묘소에 엎드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다.

정양모(전국립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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