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정호승/돈으로 詩人되면 뭘하나?

  • 입력 1999년 7월 2일 19시 22분


몇해 전 중학생 때 문예반 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를 만나 시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런데 하루는 그 친구가 느닷없이 곧 문단에 등단한다는 말을 했다. 지금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서 등단을 안 했는데, 이제는 등단할 필요가 있어서 등단을 한다는 거였다.

나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등단을 하고 싶으면 하고, 안하고 싶으면 안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등단 작품이 실린 책을 일정 부수 이상 구입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등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는 지금 직장에서 젊은 직원들을 중심으로 문학회를 조직했기 때문에 그 조직의 장으로서 시인이라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후 그는 등단했다고 하면서 자기 작품이 실린 문학잡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생전 처음 보는 문학잡지였다. 그동안 그런 문학잡지가 발간되는지 모르고 있었던 것은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거기에 실린 친구의 시는 수준이 아주 낮았다. 한국 시단에 신인으로 얼굴을 내밀 수 있는 수준의 작품이 전혀 아니었다.

그후 나는 그와 비슷한 일들을 자주 경험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마음이 허전해서 시를 공부하고 있다는 사촌 형수가 어떤 시 모임에서 등단을 시켜주겠다고 하는데 등단을 해야 하느냐고 내게 물어온 일이 있었다. 또 한 중년 여성은 자기가 어느 문학잡지로 등단을 했는데, 그 등단에 대해서 남들이 인정을 해주지 않는 것 같다면서, 그게 정말 등단이 맞느냐고, 마치 진실을 말해 달라는 것처럼 내게 물어왔다.

나는 그건 엄밀한 의미에서 등단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여성은 얼굴을 붉히면서 “내가 등단하는데 돈이 얼마나 들었는데”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최근 우리 사회에 시를 읽거나 쓰는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친구는 “요즘 대학생들은 돈이 되는 소설이나 드라마쪽에 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 걱정”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해 시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만은 사실이다.

시의 인구뿐만 아니라 그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문학잡지의 수도 엄청나다. 문예진흥원에서 발간하는 ‘문예연감’에 의하면 현재 동인지를 제외한 문학잡지가 190여 종에나 이른다. 그 잡지들은 현재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잡지들이며 등단이라는 명목으로 한 호에 열댓명씩 신인을 배출하는 잡지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서울 일부 지역에서 물론 우스갯소리겠지만 ‘아직도 등단하지 못하셨습니까?’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도 그리 큰 무리가 아닌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이 냄새를 맡을 수 없을 정도로 부패돼 있다는 것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 문단 세계만은 그런 사회적 부패에서 성큼 비켜나 있다. 그 점이 지금까지 시단의 말석에서 시를 쓰면서 살고 있는 나의 자부심이다. 한국 시단에 등단하고자 하는 분들은 차제에 스스로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등단하는데 돈이 든다면 그것이 진정한 등단일까. 그리고 또 작품성을 크게 따지지 않고 누가 등단시켜 준다고 부추긴다면 그 배후에 깔린 마음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 시인으로 등단하기 위해서는 시만 잘 쓰면 된다. 그뿐이다. 돈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 수백만원씩 상금을 받는다.

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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