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을 하나 써야 한다니까 아내가 한마디 툭 던진다. 어둡고 답답한 글보다는 밝고 명랑한 글 좀 쓰라고. 하긴 요즘 우리 주위는 온통 답답한 것 투성이다. 나라가 망해가는 것이 느껴지고 망하려면 조금씩 망하지 말고 왕창 망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말도 들린다. 왜 이렇게 됐을까. 누구나가 알고 있듯 정치 때문이다.
▼ 겉과 속이 다른 모습 ▼
언젠가 정치를 하는 동창 부부를 만났는데 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 『너는 전문직에 있으니 남의 눈치를 안봐도 살 길이 있지만 우리는 한번 찍히면 그걸로 끝이다. 살아갈 길이 없다』 항상 정장차림에 진한 머릿기름을 바르고 목소리부터 점잔빼는 그를 친구들은 경원시도 했지만 그에게는 나름대로의사정이있었던것이다.
그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친구부인이 말을 거든다. 『이이가 밖에서는 이렇게 딱딱하지만 집에 오면 그렇게 재미있고 부드러울 수가 없어요. 아이들한테도 너무너무 잘해주고요』 오래간만에 옛 친구를 만나 긴장을 푸는 모습에서 그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경직성을 보는 듯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집단. 그런 집단은 어떤 집단일까. 바로 남이 안보는 곳에서는 무슨 짓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집단이다. 국민 세금 수조원을 불법 대출하든, 나라 경제가 구렁텅이로 처박히든, 국민들이 사회적 불안과 패배감에 좌절하든, 당사자들은 별 책임감도 죄책감도 없다.
그들은 눈치만 보고 시키는대로만 해 왔기 때문에, 또 그 대가로 눈치를 안봐도 되는 곳에서는 마음껏 자유로웠기 때문에 책임질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눈 앞에서 자기가 저지른 비리가 터져도 끝까지 나몰라라 하면 위에서 알아서 해결해줄 것이다. 그때까지는 무표정하게 버티는 것이다. 괜히 나섰다가는 나만 결딴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어디 소신있는 사람을 대우하는 사회더냐. 찍히면 나만 끝장이다. 이렇게 된 것이 어디 내 탓이더냐.
黃長燁(황장엽)씨는 북한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봉건주의라고 했다. 왕과 군주가 있는 곳에서는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아랫사람은 시키는대로 하다가 왕과 군주가 몰락할 것 같으면 제 살길만 챙기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다를까. 우리 사회는 정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라, 남들이 안보는 곳에서는 무슨 짓이든지 하는 정치 행태가 빠른 속도로 파급되고 있다. 겉은 평온한 것 같지만 어둠 속의 범죄는 갈수록 흉포화하고, 겉은 정숙한 것 같지만 성폭력과 타락하는 성윤리는 극에 달하고, 겉은 진실한 체하면서 밴댕이 속까지 뒤집어 놓는 사기꾼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 「난세의 영웅」은 어디에 ▼
여기에 대한 처방은 여러가지로 내릴 수 있겠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다. 관념적인 처방에 관심을 기울일만큼 어리숙하거나 순진한 공직자나 정치인들은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 망해야 하는 걸까. 아내 말처럼 답답한 현실을 외면하고 밝고 명랑한 곳만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걸까. 정 불안하면 물려받은 재산, 그동안 벌어 모은 재산 모두 챙겨서 산좋고 물좋은 외국으로 이민이나 가고….
그럴 수는 없다. 아직 한가지가 남아 있다. 난세에 영웅이 탄생한다니 그 영웅을 기다려야 한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나라를 지켰듯 이 난세에 반드시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 갇혀 있는 이 민족이 보편적으로 갖게 되는 상식의 느낌을 묶어 현실화해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김정일<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