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롱 아니면 여성과 말 못 하나? “펜스룰은 울타리가 아니라니까요”

  • 주간동아
  • 입력 2018년 3월 17일 20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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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둘의 자리만 피하겠다’에서 ‘여성과 접점을 없애겠다’로 변질

미투운동(#Me Too)이 활발해지면서 성범죄에 대한 공분이 커지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악의를 가지고 거짓 폭로를 한다면 그 피해자를 구제할 수단이 거의 없다는 지적이다.

미투운동의 부작용을 염려하는 사람은 ‘펜스룰(Pence Rule)’을 내세운다. 펜스룰은 가볍게는 식사 같은 비공식적 자리부터, 심하면 업무에서까지 여성과 접점을 아예 없애겠다는 것. 하지만 이 같은 대응이 여성 차별이라는 지적도 있다. 관리직에 남성이 많은 한국 사회 특성상 임직원 간 공식·비공식적 소통창구를 차단하는 것은 여성에게 불이익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사실 펜스룰은 여성 배제와는 거리가 멀다. 펜스룰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연방 하원의원 시절인 2001년 의회 전문지 ‘더 힐’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지키는 결혼생활의 행동 준칙을 소개하면서 한 말이다. 그의 준칙은 ‘아내 외의 여성과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로, 사생활 관련 논란을 차단하는 방법이었다.

펜스룰, 원래는 사생황 관리 수칙

펜스 부통령보다 먼저 이 같은 규칙을 내건 사람이 있었다. 미국 보수 개신교의 유명 목사인 빌리 그레이엄(1918~2018)은 1948년 캘리포니아 중부 머데스토에서 열린 집회에서 지켜야 할 목회활동 원칙 4가지로 △교회 재정의 투명성 △복음 전파를 위한 협력 △정직한 홍보 △성적 도덕성 확보를 언급했다. 이 가운데 성적 도덕성을 확보하는 방법은 ‘아내가 아닌 여성과 단둘이 다니거나 만나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성적 추문이 생길 개연성을 원천 차단하는 동시에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그레이엄 목사의 주장이었다. 펜스 부통령 내외가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펜스룰의 원전은 ‘그레이엄룰’이라 볼 수 있다.

최근 ‘펜스룰’의 문제점을 지적한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 펜타그램제공
최근 ‘펜스룰’의 문제점을 지적한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 펜타그램제공
이처럼 애초 펜스룰은 종교인이나 공직자가 자신의 사생활을 관리하는 일종의 자기관리 수칙으로, 성차별 이슈와는 관련 없었다. 하지만 이 규칙으로 일부 여성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는 3월 6일(현지시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관리자나 임원급에 남성이 훨씬 많은 상황에서 이들이 여성 동료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피하는 것이 직장 내 성희롱을 해결할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여성들이 (업무에서) 더 불리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식사자리 같은 소통창구를 막아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경력을 키우지 못하게 한다는 취지였다. 같은 날 샌드버그는 자신이 만든 비영리단체 ‘린인닷오그(LeanIn.Org)’에서 멘토허(#MentorHer)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는 ‘여성을 멘토하라’는 의미로, 남성이 앞장서 직장에서 여성을 지원하자는 내용이다.

지난해 5월 세계여성이사협회가 발표한 ‘2017 아시아·태평양 지역 여성 이사회 임원’ 보고서를 보면 아시아·태평양 지역 주요 20개국 가운데 여성 임원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는 한국으로 2.4%였다. 남성 임원 비율이 97.6%나 되는 상황이니 펜스룰 때문에 여성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한국에서 펜스룰은 샌드버그가 지적한 단점이 더 강화된 형태로 변하고 있다. 남성 상사나 직원이 여성 직원이 있는 자리 자체를 꺼리기 시작한 것. 심한 경우 회식은 물론, 업무미팅 등도 여성 직원과 함께 하지 않으려는 경향까지 생겨나고 있다. 직장 생활 5년 차인 최모(28) 씨는 “농반진반이겠지만, 최근 관리직급의 임직원 사이에서는 여성 직원을 더는 팀원으로 받지 않겠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남성 직원들이야 그러지 마시라며 웃고 넘길 수 있지만 여성 직원에게는 위협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물론 변질된 펜스룰에 대한 비판도 있다. 미투운동 창설자로 알려진 미국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는 3월 7일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와 인터뷰에서 “(일부) 남성들이 이제 여자와 따로 비즈니스 미팅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자료를 봤다. 남성들은 여성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성희롱의 유일한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창피함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희롱 아니면 여성과 말 못 하나?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관(여성학박사)은 “펜스룰을 빌미로 직장 내 여성 차별 문화를 만드는 일부 남성의 행동이 실망스럽다. 성적 희롱이나 무시가 아니면 여성과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시인하는 것 같다”며 “미투운동을 계기로 그동안 우리 사회가 여성을 대하는 방식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성찰해야 하는 상황인데 오히려 펜스룰을 왜곡해 여성을 따돌리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남성은 성희롱 기준이 모호한 만큼 지금은 펜스룰이 가장 적합한 성희롱 예방책이라고 주장한다. 회사 여직원과 일대일 식사자리를 만들지 않는 형태로 펜스룰을 지키고 있다는 직장인 정모(33) 씨는 “옷이 예쁘다, 오늘 머리가 잘 됐다 등 선의로 칭찬하더라도 상대 여성이 불쾌감을 느끼면 성희롱이 될 수 있다고 들었다. 내 표현이나 행동이 의도와는 다르게 성희롱으로 읽힐 수 있다는 생각에 여성 동료들을 피하게 된다. 명확한 행동 준칙이 있었으면 싶다”고 밝혔다.

미투를 가장한 거짓 폭로가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대학생 유모(25) 씨는 “일부 유명인의 예만 봐도 폭로가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질 때까지 피해를 막을 방법이 없다. 게다가 추문이 전파되는 속도는 빠르지만 그것의 진위 여부가 밝혀진 뒤 해명이 알려지는 속도는 늦다. 이런 상황에서 펜스룰은 일종의 자기방어 수단”이라고 말했다.

펜스룰을 지키는 것은 개인 문제지만, 이와 같은 내용을 논의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주장도 있다. 미투운동으로 각계각층에 만연한 성범죄를 근절하자는 인식이 퍼지기도 전에 미투운동의 부작용만 강조될 수 있다는 것. 직장인 김모(26) 씨는 “백번 양보해 가이드라인이 부족하고 무고하게 당할 위험이 있다 해도 지금은 펜스룰을 얘기할 때가 아닌 것 같다”고 주장했다.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8년 113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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