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관을 찾아서⑪]전쟁 황폐기 가마지킨 13代 심수관

  • 입력 1998년 7월 6일 19시 56분


일본이 전쟁에 광분하던 시대를 살아야 했던 13대 심수관은 도공으로서 가장 힘든 세대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교토대학을 나온 수재였으면서도 물레를 돌리며 가업을 이었다.

눈에 띄게 뛰어난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도 차라리 그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도자기 문화는 그 시대에 따라 부침해 왔다. 풍요의 시대에는 도자기도 찬란하게 꽃피지만 사회가 황폐할수록 도자기도 초라해진다.

작품으로 빛나는 발전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그 황폐한 시대에 가마를 지켰다는 도공으로서의 뛰어남이 13대에는 있다. 그래서인가. 그에게는 인간적인 일화가 많다.

그 가운데서도 특이한 것은, 그가 언제나 날씨를 어김없이 잘도 알아맞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은 언제나 그에게 와서 내일의 날씨를 묻곤 했다고 한다.

아들이 자라자 그는 어느 날 세 개의 말꼬리를 건네 주었다. 말꼬리는 성형이 끝난 작품을 물레에서 잘라낼 때 쓰는 물건이었다. 도공은 평생 도공일 뿐, 올라갈 어떤 계단도 없는 직업이었다. 그 단순성의 지루함에 작은 변화를 주기 위한 아버지의 마음은 그렇게 깊었고 14대 심수관 소년은 기뻤다. 네가 만든 것을 네가 잘라서 가마에 넣고 굽거라. 너는 이제 한 사람의 도공이 되었다. 그런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식에게 “물레의 심(芯)을 잊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물레에 점토를 놓고 돌릴 때 가장자리 부분은 돌아가지만 한가운데는 정지되어 있다.

“움직이는 물레의 안에 움직이지 않는 한 점이 있다. 그것이 심이다. 온 힘을 다해 움직이는 물레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심을 찾아가는 것이 도공의 일생이다. 그 심을 발견할 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일본이 전쟁의 막바지에 휘몰리고 있을 때였다. 중학생이던 14대 심수관은 자신도 다른 학생들처럼 지원병으로 참전을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들에게 13대 심수관은 말해 주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삶이 있다. 하나는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난관을 헤치고 나가면서 살아 남는, 동물적인 삶이다. 그러나 다른 삶도 있다. 식물을 보아라. 그는 어떤 환경에 떨어지더라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살아남아서 자신의 운명을 완성하는 것에 모든 것을 다한다. 도공의 삶이란 저 풀과 나무와 같은 삶이어야 한다.”

그 말을 듣고 났을 때 비로소 14대 심수관은 자신을 지켜 줄 어떤 추 같은 것이 가슴에 자리잡았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1964년 4월1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국회의원 비서 등 사회활동을 하던 그는 14대 심수관을 이어받아 도공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새 34년이 지나갔다. 13대의 시대는 도공으로서의 밑바닥이 허물어지던 가혹한 시대였다. 그런 세월을 살면서 그는 늘 좋은 때가 오면 이런 일을 하고 싶다, 저런 일을 해 봐야지 하는 이야기를 아들에게 했었다.

“내가 도공으로서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은 아버지가 하고 싶어 하셨던 바로 그것들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직원들이 다 돌아가고 저녁 어스름이 찾아오는 전시장 한 구석에 심수관씨와 둘이 앉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감나무 잎을 때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도 이제 돌아가면 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리라. 빗소리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수장고 속의 작품들이 그때는 하나씩 통 속에 넣어져 있었다. “무엇을 만들지는 네 마음이 가르친다. 그러나 작은 예술적 가르침은 선조의 작품에서 배워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대로 14대 심수관은 그것 하나하나를 꺼내 먼지를 털어내며 자신이 이어가야 할 도예의 시대를 예감해야 했다.

“너는 자유인이다. 가문의 전통같은 것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 속에서 네 작풍(作風)을 만들어가라.” 그것이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한수산(작가·세종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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