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는 1988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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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서울올림픽 30돌]<1> ‘스포츠 강국’ 기폭제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88 서울 올림픽 우승 축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고병훈 감독(왼쪽)이 이끈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아일보DB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88 서울 올림픽 우승 축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고병훈 감독(왼쪽)이 이끈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아일보DB

《 17일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 3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유치 단계부터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서울 올림픽은 모든 난관을 뚫고 가장 성공적인 대회로 기록되었습니다. 올해 한국은 평창 겨울올림픽 역시 성공적으로 치렀습니다. 이러한 성공의 저변에는 서울 올림픽의 유산이 깔려 있습니다. 서울 올림픽의 의미와 한국 스포츠의 방향을 살펴봅니다. 》
 
1988년 9월 17일 오전 6시. 서울 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인 임춘애(49)는 오전 10시 30분에 시작되는 올림픽 개회식을 불과 3시간여 앞두고 처음으로 성화 봉송 연습을 했다. 성화 최종 주자는 원래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고 손기정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일본 언론이 이를 보도하자 박세직 조직위원장은 대회 개막 직전에 최종 주자를 바꾸었다. 최종 주자가 미리 알려져 극적 효과가 줄어들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임춘애는 당시를 회상하며 “전날 오후 11시에 성화 최종 주자가 됐다는 통보를 받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바로 잠실 주경기장으로 갔다”고 회상했다.

1986 아시아경기 3관왕이었던 육상 스타 임춘애는 “당시엔 나이가 어려 성화 봉송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성화가 무거워서 떨어뜨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최종 주자 임춘애가 넘긴 성화를 전남 소흑산도 분교 교사였던 정선만, 마라토너 김원탁, 서울예고 3학년이었던 손미정이 함께 이어 받아 성화대에 점화했다. 유치 단계부터 매 순간이 극적인 드라마와도 같았던 서울 올림픽이 본격 막을 올린 순간이었다.

이날부터 10월 2일까지 전 세계 160개국이 참가해 열전을 치른 서울 올림픽은 동서 화합의 상징적 무대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가장 성공적인 대회로 손꼽힌다. 한국 스포츠 활성화의 기폭제가 된 것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자신감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 올림픽 30주년을 맞아 17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과 올림픽파크텔에는 ‘인간 새’로 불렸던 옛 소련의 장대높이뛰기 스타 세르게이 붑카 국제육상경기연맹 부회장(55), 펜싱 선수 출신으로 헝가리 대통령을 지낸 슈미트 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76), 임춘애 전 대한육상연맹 여성위원회 위원 등 옛 스포츠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동유럽 국가 중 가장 먼저 서울 올림픽 참가를 확정지은 헝가리는 1989년 한국과 수교를 맺은 첫 공산주의 국가가 됐다. 슈미트 위원의 30주년 기념식 참석은 내년에 있을 한국-헝가리 수교 3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의미도 있다. 붑카는 서울 올림픽에서 5m90의 당시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이날 행사에서는 임춘애 장재근 등 서울 올림픽 당시 출전 선수들과 선수단원들이 모인다.

유도 김재엽, 탁구 현정화 유남규 등 645명의 선수단 명단을 새긴 가로 20m, 세로 5m 크기의 ‘영광의 벽’이 제막된다. 여기에는 박세직 당시 조직위원장을 비롯해 1488명 조직위원회 직원 전원의 이름이 새겨졌다. 자원봉사자 2만6000여 명의 활동에 대한 감사의 글귀도 적혀 있다.

○ 불투명했던 유치와 개최-불가능을 가능으로

서울 올림픽 유치 의견은 1979년 10월 초 박정희 정부에서 처음 나왔다. 박종규 당시 대한체육회장이 주도한 의견이었지만 크게 환영받진 못했다. 1981년 서울 올림픽 유치 당시 대한체육회 국제과장이었던 오지철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처음부터 올림픽 유치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경쟁 상대는 일본의 나고야였다. 일본에 비해 국제적 인지도나 국력에서 한국이 크게 밀렸다. 한국은 이미 아시아경기를 유치했다가 반납한 사례도 있었다.

오 전 차관은 “한국 정부가 올림픽 유치 의사를 확실히 한 것은 올림픽 유치 결정을 불과 두 달 앞둔 1981년 7월경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유치 방침이 정해지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총력전이 벌어졌다. 정부는 물론이고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비롯해 많은 기업도 대거 참여해 힘을 보탰다. 한국은 IOC 위원의 개인 성향과 감성까지 파악하며 득표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1981년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서울은 나고야를 52 대 27로 꺾고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됐다. 당시 총리실 행정조정관으로 올림픽 관련 업무를 총괄했던 이연택 전 대한체육회장(82)은 “불가능하다고 여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다. 5000년 역사의 국운이 한데 모인 셈이다”고 말했다. 극적인 유치 이후에는 치밀한 준비가 뒤따랐다. 이 전 회장은 “선수촌 주변에 늪지가 있어 모기가 많다는 보고까지 들어올 정도로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세세히 챙겼다”고 했다.

서울 올림픽은 당시까지 사상 최다 참가국(160개국), 최대 참가인원(8456명)을 기록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동서 진영이 모두 참여한 올림픽이었다. 윤강로 국제스포츠외교연구원장(62)은 “서울 올림픽 다음 해에 독일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되면서 15개 독립 국가로 분리됐다. 서울 올림픽이 냉전을 종식시키는 데 가장 큰 디딤돌 역할을 한 셈이다”고 말했다.

○ 88 서울 올림픽은 한국 스포츠 도약의 기폭제

IOC는 올해 초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서울 올림픽의 성공이 한국을 스포츠 강국의 반열에 올려놨다”고 홈페이지에 소개했다. 서울 올림픽 전까지 겨울·여름올림픽에서 메달 37개에 그친 한국은 그 후 올림픽에서 297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한국은 서울 올림픽 이후 치러진 7번의 대회에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12위)을 제외하면 매 대회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 개최지 선정 이후 엘리트 스포츠 육성에 힘을 쏟은 영향이 컸다. 이연택 전 회장은 “체육부 주도로 전국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기초체력 측정을 통해 ‘88 꿈나무’를 발굴했다. 2000명이 넘는 유망주를 키워 아시아경기와 올림픽에 대비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유망주 발굴 정책의 성과로 한국은 1984 로스앤젤레스(LA) 대회에서 종합 10위(금 6, 은 6, 동메달 7개)에 올랐고, 1988 서울 대회에서는 금 12개로 종합 4위에 올랐다.

양궁 레슬링 유도 등 한국이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기록한 종목은 이후에도 ‘메달밭’ 노릇을 톡톡히 했다. 윤 원장은 “88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당시 기업 총수들도 경기단체 지원에 앞장섰다. 소위 ‘효자 종목’들은 이때의 지원이 밑거름이 돼 성장했다”고 말했다. 1984년 LA 대회부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한 번도 금메달을 놓치지 않은 양궁은 1983년 협회 창립부터 정몽준 당시 현대중공업 대표이사를 비롯한 현대그룹 일가가 회장직을 이어가며 지원했다. 레슬링은 이건희 삼성 회장이 협회장으로 재임했던 1982년부터 1997년까지 황금기를 맞았다.
 
조응형 기자 yesbro@donga.com
#88 서울 올림픽#30주년#평창 겨울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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