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이승엽 홈런’이 유일한 樂인 세상

  • 입력 2006년 8월 4일 19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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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이승엽이 홈런 치는 것 보는 재미로 산다. 내 주위에도 그렇다고 말하는 이들이 꽤 많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 타자 이승엽은 앞뒤가 꽉 막힌 듯 답답하고 짜증나는 세상에 그나마 숨통을 터 주는 청량제 같은 존재다.

이승엽은 강하고 성실하며 당당하고 겸손하다. 이승엽은 좀처럼 자신의 공(功)을 앞세우지 않는다. 홈런을 쳐 경기를 승리로 이끌고도 팀을 먼저 얘기하고 동료 선수에게 감사한다. 연패(連敗)에 허덕이는 팀을 혼자 이끌어 가면서도 경기에 지면 마치 자기 탓인 듯 미안해한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다시 방망이를 곧추세우고 타석에 들어선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이 시대가 잃어버린 용기와 희망을 상상하고 위안을 찾는지도 모른다. ‘이승엽 홈런’이 유일한 낙(樂)인 세상이다.

김병준 교육부총리가 사퇴 의사를 밝힌 지난 수요일 오후 필자와 전화통화를 한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은 “작은 산을 하나 넘었다”고 말했다. ‘김병준 파동’을 자진사퇴로 정리해 내는 일도 수월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김 의장의 고심(苦心)을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일반 국민으로서는 그거야 어디까지나 ‘당신들 사정’일 뿐이다.

‘김병준 파동’은 이 나라 권력과 정치 전반에 대한 대중의 염증과 냉소, 무관심을 증폭시켰다. 민심에 등 돌린 채 부적절한 인사를 고집하는 대통령과 ‘그들끼리의 주도권 다툼’으로밖에 비치지 않는 당-청(黨-靑) 갈등, 여야(與野)가 벌인 3류 청문회 뒤에 터져 나온 ‘저질(低質) 드라마’에 채널을 맞출 시청자는 없다. 김병준 씨는 자신의 명예를 살리고 모양 좋게 물러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명예와 모양’을 어디 이승엽의 홈런 한 방에 견주겠는가.

문제는 이런 질 낮은 드라마가 좀처럼 끝나지 않을 듯싶다는 데 있다. 당장 대통령의 최측근인 문재인 씨의 법무부 장관 기용에 반대하는 여당 지도부를 청와대가 공개적으로 성토하고 나섰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물론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그러나 고유 권한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 3년 반의 성적표는 낙제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국민은 그 실패에 책임 있는 인물들을 돌아가면서 요직에 앉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대통령이 국민의 신뢰를 잃으면 이미 레임덕이다. 하물며 민심에 반(反)하는 인사로 소모적인 분란을 거듭하면 레임덕은 더 빠르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민심은 다 옳은 것이냐고 하지만 한 사람의 생각보다 만 사람의 의견이 옳을 확률이 높다는 것은 여전한 진리다.

남북문제도 그렇다. 우리 국민 중에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나도 괜찮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안정적 평화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정부의 말은 옳다. 이 정부의 잘못은 평화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이르러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주국방 싫어할 국민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막대한 비용이 든다. 전직 국방장관들이 입을 모아 전시작전권 환수 논의 중단을 요구하는 것도 그들이 몽땅 ‘친미반북(親美反北)’이어서인가. 나라와 국방의 현실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8·15 경축사를 계기로 나라의 큰 가닥이나마 다시 정리하기 바란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뚜렷이 하고, 한미 동맹을 복원(復元)해야 한다. 김정일 정권의 기만적인 민족 공조(共助) 놀음에 더는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경제와 민생을 살릴 수 있는 사회적 대타협의 선두에 나서야 한다. 법치(法治)를 확고히 해 사회 혼란과 그에 드는 비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가닥을 정리하는 데 우선 요구되는 것은 대통령부터 ‘증오의 덫’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일거에 전복(顚覆)시키고픈 ‘혁명의 열정(熱情)’을 잠재워야 한다. 역(逆)발상, 역주행으로 역사의 평가를 받겠다는 오기(傲氣)는 그만 버려야 한다. 이승엽이 욕심을 접고 결대로 밀어 쳐 홈런을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민심과 대화한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남은 임기를 마무리해야 한다. 아직 1년 반이 남았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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