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갈라지고 막힌 세상

  • 입력 2004년 9월 20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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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나라가 두 동강이라도 난 듯 시끄러운 국가보안법 논란도 기실 그 내용을 실질적 관점에서 보면 ‘안경을 바꾸는데 안경알만 바꿀 것이냐, 안경테까지 바꿀 것이냐’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안경알만 바꿔도 충분하지 않으냐고 하고, 다른 쪽은 기왕 바꿀 거면 안경테까지 바꿔야 한다고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안경알과 안경테를 싹 바꿔야 한다고 했고,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안경알은 몰라도 안경테까지 바꿔선 안 된다고 했다.

▼이분법적 단순논리의 덫▼

안경알은 내용이고 안경테는 형식이다. 형식이 내용을 규제하는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내용이다. 안경알의 도수를 어쩔 거냐는 문제가 남지만 그거야 쓰는 이의 시력(視力)에 맞춰 여야(與野)가 국회에서 조정하면 될 일이다. ‘쓰는 이’는 국민이고 ‘시력’은 국가안보에 대한 현실 인식이다. 그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다수 국민은 국보법의 완전 폐지보다는 부분 개정 및 보완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일단 거기에 맞추는 것이 순리(順理)다. 물론 국보법 폐지 주장에는 나름의 당위성이 존재한다. 지난 세월 그것이 독재정권의 정권안보용 악법으로 기능하며 숱한 인권유린을 저질러 왔다는 것은 국민도 알만큼 안다. 그러나 국민은 이제 그런 악폐(惡弊)가 더 이상 허용되지 못하리라는 믿음 또한 갖고 있다. 이는 여전히 인권침해 가능성이 남아 있는 일부 독소조항을 없애거나 고친다면 국가안보의 상징적 존재로서 국보법이 유지되어도 괜찮다는 자신감과도 통한다.

정권을 담당한 사람들이라면 이 같은 민의(民意)를 존중한다는 전제 아래 형법에 보완하거나 대체입법을 하면 어떻겠는가, 그 구체적 내용을 내놓고 야당과 협의하겠으니 지켜봐달라고 했어야 한다. 그렇게 단계를 밟아 국민을 설득하면 국보법은 자연스럽게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이분법적인 단순논리로 국보법 폐지를 강조하면서 상황은 엉망이 돼 버렸다. 헌재와 대법원은 졸지에 냉전수구 집단으로 전락했고, 한나라당은 모든 것을 걸고 국보법을 지키겠다고 흥분했으며, 열린우리당은 단번에 폐지 당론으로 돌아섰다. ‘보수 원로’와 ‘진보 원로’가 삿대질을 하고 종교계도 갈라졌다. 그러는 사이 정작 국보법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사라지고 ‘친노(親盧)-반노(反盧)’의 거친 숨소리가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

노 대통령은 국보법 개폐 논의는 입법부인 국회에 맡긴다고 했어야 한다. 대통령으로서는 국보법 폐지가 ‘역사적 결단’이라고 하더라도 엄연히 양면이 존재하는 민감한 사안을 두부모 자르듯 선악(善惡)의 잣대로 나누는 일은 당연히 자제해야 했다. 하기야 그것이 ‘노무현 화법(話法)’의 특징이고,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닌 줄은 알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나라를 시끄럽게 할 것인가.

노 대통령의 화법처럼 복잡한 사안을 단순화하면 명쾌한 논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의 선동이 될 수 있고, 그럴 경우 또 다른 선동을 부르기 십상이다. ‘보수 원로’ 모임에서 6·15남북정상회담을 부정하고 대통령 탄핵 얘기까지 터져 나온 게 단적인 예다. 또 ‘아무개도 원로라고 할 수 있나?’라고 할지언정 국무총리가 ‘보수 원로’측을 싸잡아 ‘쿠데타 세력’으로 몰아붙여서야 되겠는가.

▼소통 없이 公論 없다▼

이렇게 되면 사회공동체 내의 소통(疏通)은 이루어질 수 없다. 강경한 극단론이 힘을 얻으면 합리적 중간세력은 위축되거나 침묵하게 된다. 이렇게 소통이 막힌 사회에서 제대로 된 공론(公論)이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건강한 공론은 사라지고 증오와 적대, 편견과 불신으로 사회구성원이 편 가름될 때 그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노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을 없애야 대한민국이 문명의 국가로 간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지만 국보법을 없앤들 소통 부재(不在)의 분열 사회에서 문명국가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우선 여야가 소통해야 한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나라가 망가진다.

전진우 논설위원 실장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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