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억 이슬람과의 대화]파키스탄/'국제고립 벗기' 노력

  • 입력 2001년 6월 3일 18시 44분


기온이 40도까지 올라가는 한여름을 맞은 파키스탄. 흙먼지 속에서 릭샤(삼륜택시) 미니버스 트럭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달리던 승용차가 신호등 앞에 멈춰서면 몇몇 소년이 신문이나 꽃을 사달라고 창 앞으로 내민다. 그 뒤로는 일반 아시아인과 달리 훤칠한 키에 구레나룻을 잘 가꾼 파키스탄인들이 보따리를 둘러메고 바쁜 걸음을 놀리고 있다.

오전 4시반 기도준비를 알리는 ‘아잔’이 스피커로 흘러나오면 파키스탄인들은 잠에서 깨어나 이슬람 율법에 따른 하루를 시작한다. 도시의 모스크는 앞마당까지 합하면 수만명이 동시에 기도할 수 있을 만큼 크다.

5월23일 세계의 눈길이 서남아시아에 쏠렸다. 인도가 파키스탄에 50년 이상 묵은 카슈미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대화를 제의한 것. 정상회담은 6, 7월 중 열릴 예정이지만 파키스탄은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외무부 아시프 에즈디 차관보는 “우리는 수년 동안 대화 제의를 여러 차례 해왔으며 인도가 이제야 응한 셈”이라면서 “무력과 사기술로 카슈미르 일부를 지배해온 인도의 정책이 실패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공박했다. 일간영자지 돈(Dawn)의 M 지아우딘 지국장도 “파키스탄 고립정책을 써온 인도가 대화 없이는 안된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라며 “금방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대화재개는 긍정적”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영연방 인도는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갈라져 독립했다.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분리였다. 두 나라는 카슈미르 방글라데시 등의 문제로 세 차례 전쟁을 벌였다. 갈등은 핵무기 확보 경쟁으로 번졌다. 1998년 5월15일 인도가 먼저 핵실험에 나섰고 이에 질세라 28일엔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파키스탄 국민은 적대국인 인도를 견제할 수 있는 핵 보유국이 된 것에 열광했지만 만 3년이 지난 지금은 다르다. 페샤와르의 핵실험 기념탑을 가리키며 “요즘은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묻자 기자를 안내하던 페샤와르의 한 공무원은 “제각각 생각이 다르다”고 말했다. 긍정적인 평가는 인도의 도발을 막는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영향은 미국 등으로부터 제재를 당해 경제가 어려워지고 국제사회에서 나쁜 소리를 듣게 됐다는 점.

파키스탄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서방의 평가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다. 43년간 철학 비교종교학 교수를 지낸 모하무드 왈리 라지 신드주(州) 종교장관은 “극단주의 원리주의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로 우리를 묘사하는 것은 미국 등 서방언론의 선전극”이라면서 “이슬람교도는 개미 뱀 같은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에게조차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경제제재 등으로 피해를 본 때문인지 경제인들은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 경제인단체 간부는 “서방언론과 인도TV가 우리를 나쁘게 묘사해 우리가 세계에서 손가락질 받고 있다”면서 “미국은 병사 한 명 보내지 않고 CNN을 통해 파키스탄을 공격해대고 있다”고 비난했다.

파키스탄은 군사정부가 장악하고 있다. 1999년 10월 쿠데타로 집권한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은 ‘행정수반(CE·Chief Executive)’으로 불린다. 공무원 사이엔 ‘CE 지시면 다 된다’는 농담이 나돈다. 돈지의 지아우딘 지국장은 “제도적인 부패방지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무샤라프 장군이 제시한 또 하나의 목표는 경제개혁. 60%가 넘는 지하경제를 축소하고 무자료 거래를 없애겠다는 등 세제 개혁은 아직 가시적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 현지 외교단은 진단했다.

무샤라프 장군은 취임 직후 중국과 인근 이슬람국가 방문, CNN BBC 등 서방 유수 언론과의 인터뷰, 카슈미르 아프간 핵 테러 등 현안에 대한 홍보 등으로 바빴다. 이 같은 이미지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외교적 고립상태에 있다. 미국은 이달 중 파키스탄 외무장관 방미 때 경제제재를 해제할 것으로 전해진다.

파키스탄 대법원은 쿠데타가 합법적이었다고 판결하면서도 쿠데타 거사 3주년 전에 연방의회와 지방의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군부는 민정 이양시 총리직은 민간에 넘기되 현재 이름뿐인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해 놓은 다음 대통령직을 차지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개혁 진행에 따라서 올 가을에 총선을 실시할 가능성도 있다고 외교가는 보고 있다.

▼북서부 페샤와르 지역…아프간 난민 몰려와 수용능력 한계▼

파키스탄 북서부의 오래된 도시 페샤와르 주변엔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많다. 1979∼8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 난민 100만명 이상이 파키스탄을 찾았다. 지난해 9월 이후 가뭄을 견디다 못한 17만명이 유입됐다.

10년 이상된 난민촌 상가엔 물건도 제법 많다. 그 중 하나인 잘로자이 난민촌의 골목으로 들어가 흙벽돌집 사이를 차로 10여분 헤쳐가자 총 4㎢의 천막촌이 펼쳐진다. 2만여명의 ‘불법 난민’이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곳이다. 큰 천막 하나에서 2,3 가구가 함께 산다. 5개월 전 가족 6명과 국경을 넘은 50대 남자는 천막촌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지원을 호소했다.

“물은 오전이면 바닥나고 식량도 태부족입니다. 더 큰 걱정은 이곳에서 살 수 있을지, 아프가니스탄으로 송환될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파키스탄 정부는 작년말 “수용능력이 한계에 다다랐다”면서 난민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뒤 들어온 난민에 대해서는 이달부터 개별심사 후 적격자 30%정도만 남기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려보낼 예정. 외무부 아시프 에즈디 차관보는 “전쟁난민이라면 몰라도 먹을게 없어서 넘어오는 경우는 다 받아줄 수 없다”고 말했다.

99년 페샤와르 시내에서 아프간대가 문을 열었다. 의학 약학과 등 9개과에 학생 수 2029명, 교수 170명 규모다. 아사둘라 학장은 “아프가니스탄 젊은이에게 고등교육을 제공하지 못하면 아프가니스탄의 미래는 없다”면서 “교수봉급 학생학비나 책 복사비 등을 세계 각국에서 지원 받아 쓰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했다.

윤지준 주 파키스탄 한국대사는 “난민 지원 요청서가 많이 오지만 예산이 없어 답장도 못한다”면서 “경제력 세계 13위인 한국이 인색한 나라로 여겨질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파키스탄 약사▼

711년 아랍제국 침입

1526년 무굴제국 성립

1858년 영국에 귀속됨

1947년8월 영연방에서 독립

(인도에서 분리)

1948년 1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

1965년 2차 〃

1971년 방글라데시 분리, 독립

1998년5월 핵실험 성공

1999년10월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

쿠데타

2002년10월 민정 이양 예정

▼파키스탄 개요▼

국가명 파키스탄 이슬람공화국

면적 79만6095㎢(한반도의 약 3.5배)

인구 1억3951만명(2000년 12월 기준)

수도 이슬라마바드(인구 70만명)

인종 인도 아리안, 드라비다, 터키,

기타 혼혈

종교 이슬람교 97%(이 중 수니파가 77%)

힌두교 기독교

언어 우르두어(공용어) 영어(공문서)

기타 종족별 언어

독립일 1947년 8월14일

대통령 무하마드 라피크 타라르(국가원수)

행정수반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

화폐단위 루피(1달러〓63.8루피)

1인당GNP 443달러(1999회계연도)

시차 한국보다 4시간 느림

<페샤와르〓홍권희기자>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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