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 93]DJ 비자금 의혹 폭로

  • 입력 1998년 12월 21일 19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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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당 대통령후보인 이회창(李會昌)총재의 지지도가 10%대까지 추락한 뒤 좀처럼 반등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97년 10월7일 오후3시경.

서울 여의도 신한국당 중앙당사 2층 기자실에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자청한 신한국당 강삼재(姜三載)사무총장이 두툼한 봉투를 들고 들어섰다.

“신한국당은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수많은 국민의 제보에 힘입어 김대중(金大中·DJ)총재의 소위 ‘20억원+α’의 명백한 증거를 확보했다. 나아가 김총재가 처조카 이형택(李亨澤)씨를 통해 3백65개의 가차명 및 도명계좌에 입금액 기준으로 6백70억원을 관리해온 사실이 확인됐다. 또한 충격적인 사실은 92년 대선 이후 김총재가 쓰고 남은 비자금 중 62억4천만원이 이씨의 주도로 재벌과 사채업자를 통해서 불법으로 실명전환됐다는 것이다. 김총재는 평소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자처해왔으나 ‘행동하는 비자금창고’ ‘세탁이 필요한 양심’임이 확인됐다.”

강총장이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평화민주당’이라고 배서된 1억원짜리 자기앞수표 사본까지 첨부돼 있었다.

순간 기자실은 아수라장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중앙당 당직자들까지 강총장의 기자회견 소식을 듣고 몰려와 기자실은 아예 북새통이었다.

강총장의 ‘DJ비자금’폭로는 곧바로 중요한 의문점 하나를 제기했다.

강총장이 제시한 자료에 담긴 내용은 안기부나 검찰 국세청 등 국가사정기관이 아니고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권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김대중 압박작전’이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낳았다. 게다가 강총장은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뜻을 정확하게 읽는 김대통령의 심복이었다. 결국 김대통령이 폭로의 배후라는 추측이 강하게 제기됐다.

그러나 강총장의 폭로 직후 청와대는 심각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당시 청와대 한 관계자의 설명.

“김대통령은 강총장의 기자회견 내용을 보고받고 아무 말이 없었지만 몹시 화가 난 듯했다. 도대체 자료가 어디에서 유출된 것이냐는 것이었다. 김대통령은 맨 먼저 권영해(權寧海)안기부장을 의심했다. 김대통령은 권부장을 불러 ‘안기부에서 수집한 자료냐’고 물었다. 그러나 권부장은 ‘우리 쪽에서 나간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김대통령은 이때부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강총장으로부터 ‘이회창총재로부터 받은 자료인데 그 이상의 출처는 모른다’는 간략한 전화보고를 받았지만 청와대에서 빠져나간 자료일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강총장은 기자회견 전날 밤 이총재로부터 “내일 아침 일찍 집(서울 종로구 구기동)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강총장, 대통령을 위해 많은 일을 했고 그 때문에 욕도 많이 먹은 줄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하나 해줘야겠습니다. 김대중후보를 가만히 놓아둬서는 안되겠는데 나한테 이런 자료가 들어왔습니다. 국회에서 공개하는 방법도 있지만 당에서 비중있게 다뤘으면 좋겠어요.”

이총재는 두께가 30㎝ 가량 되는 자료꾸러미를 내밀었다. 이총재는 강총장이 95년 말 ‘20억원+α’설을 제기하는데 앞장선 사실까지 거론하면서 강총장이 이번 일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알겠습니다. 사무총장으로서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강총장은 순간 머리가 무거워졌다. 그러나 대통령선거라는 전시(戰時)상황을 생각해 선뜻 이총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총재는 ‘1차 6백70억원 비자금조성의혹’ ‘2차 기업비자금수수의혹’ ‘3차 친인척비자금관리의혹’의 순으로 자료에 넘버링을 해가며 발표순서와 날짜까지 정해줬다.

이총재의 집을 나와 당사에 도착한 강총장은 즉시 고교 동기동창이기도 한 김충근(金忠根)총재보좌역을 불렀다. 강총장은 자료를 건네주면서 “무조건 오늘 오후까지 회견문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DJ비자금 폭로로 정치권에 엄청난 소용돌이가 몰아닥쳤지만 정작 이총재는 함구로 일관했다. 이총재는 10월12일에야 부산에서 “이번 사건은 흠집내기 차원이나 정국전환을 위한 술수가 아닌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기 위한 것”이라고 처음으로 언급했다. 다음날인 13일에는 “지금 우리는 혁명적 과업을 수행중”이라며 구시대 정치와의 ‘성전(聖戰)’을 선포했다.

이총재가 비자금 폭로를 주도했다는 정황은 폭로 당일 오전 이총재를 만났던 강재섭(姜在涉)총재정치특보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그날 아침 이총재로부터 시내에 있는 웨스틴조선호텔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호텔로 가는 도중에 ‘다른 약속 때문에 1시간쯤 늦을 것 같으니 잠깐 호텔 안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연락이 다시 왔다. 무슨 일이 있나 하는 사이에 호텔에 도착해보니 박찬종(朴燦鍾)고문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총재가 박고문의 선대위원장직 수락을 약속받기 위해 만나는 것 같았다. 한참 후에 이총재가 나타나 총재비서실장 인선문제를 상의했다. 얘기가 다 끝나갈 무렵 이총재가 문건 하나를 건네주더니 ‘오늘 중요한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건을 들여다보니 DJ비자금 관련자료였다. 자세히 훑어보려는데 이총재가 ‘1부밖에 없다’며 문건을 다시 가져갔다.”

실제로 김대중후보의 약점을 수집하기 위한 노력은 이미 2, 3개월 전에 구성된 ‘DJ대책팀’에 의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신한국당 핵심 관계자의 증언.

“8월 초쯤이었다. 이총재가 하루는 ‘테니스를 할 때도 그렇지만 남을 봐주다가는 내가 죽게 돼있다. DJ를 그대로 둬서는 안되겠다. 선거에 이기려면 이인제(李仁濟)파일과 김영삼대통령의 대선파일도 갖고 있어야겠다’고 말했다. 알아봤더니 이총재의 아들 병역시비 등 국민회의측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김기춘(金淇春) 김영일(金榮馹) 정형근(鄭亨根) 황우려(黃祐呂)의원 등으로 ‘DJ대책팀’이 구성돼있었다.

그러나 김기춘의원은 점잖은 사람이어서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황의원은 판사출신이라 별 도움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김영일의원과 정의원이 주로 움직였는데 9월 하순경 정의원이 어디선가 비자금 자료를 구해왔다.”

정의원은 9월 하순경 중고교 대학동창인 배재욱(裵在昱)청와대사정비서관으로부터 이른바 ‘사직동팀’이 95년 말부터 추적해온 DJ비자금 자료를 입수했다. 그는 곧바로 이총재에게 보고했다.

1차 폭로에 이어 10월8일 2차로 기업비자금수수의혹을 폭로하기로 계획돼 있었다. 그러나 기업의 로비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당내 의원들의 반발로 하루가 늦춰졌다.

10월9일 이총재는 전주이씨 종중모임에 참석차 전북 전주에 도착한 즉시 강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왜 2차폭로를 하지 않느냐”고 독촉했다.

결국 이날 이사철(李思哲)대변인이 2탄을 터뜨렸다. 10월14일에는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장에서 친인척 비자금 관리자료가 3차로 공개됐다.

신한국당은 10월16일 그동안 폭로한 자료를 근거로 대검찰청에 김대중후보를 고발했다.

그러나 김태정(金泰政)검찰총장은 10월21일 “DJ비자금 수사를 15대 대선 이후로 유보한다”고 공식발표했다.

김총장은 “어느 누구와도 협의하지 않고 검찰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총재측은 즉각 김후보측이 92년 김대통령의 대선자금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한 데 따른 것이라며 음모설을 주장했다.

반면 수사유보 결정은 김대통령의 독단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신상우(辛相佑)국회부의장의 술회.

“이총재가 DJ비자금을 폭로했을 때 김대통령은 고민을 많이 했다. 김대통령은 DJ비자금을 조사하게 되면 선거판 전체가 혼탁해지고 페어플레이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불문에 부치기로 결심했다. 이 문제로 김후보측으로부터 소명하겠다는 연락도 있었고 이총재측으로부터는 검찰에 수사를 지시하라는 압박도 있었지만 김대통령은 어느 누구도 만나주지 않은 채 혼자 수사유보를 결정했다.”

이총재는 김검찰총장이 수사유보를 발표한 다음날인 10월22일 김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며 결별을 선언했다.

대선정국에 던져진 ‘DJ비자금’이란 ‘핵폭탄’은 끝내 불발탄이 되고 말았다.

〈김정훈기자〉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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