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방사광가속기 16년 무사고는 ‘스테인리스 요강’ 덕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4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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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가속기 불모지 한국서 건설 뚝심

포항가속기연구소에 자리 잡은 3세대 방사광가속기. 도넛 모양의 건물 안에 방사광가속기가 놓여 있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왼쪽 녹지대에 설치할 예정이다. 포항가속기연구소 제공
포항가속기연구소에 자리 잡은 3세대 방사광가속기. 도넛 모양의 건물 안에 방사광가속기가 놓여 있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왼쪽 녹지대에 설치할 예정이다. 포항가속기연구소 제공
전자총의 방전 문제를 해결한 스테인리스 요강. 1991년 가속기 건설 당시 요강을 설치하는 모습이다. 포항가속기연구소 제공
전자총의 방전 문제를 해결한 스테인리스 요강. 1991년 가속기 건설 당시 요강을 설치하는 모습이다. 포항가속기연구소 제공
“이 자리에 ‘요강’이 있었습니다. 작년에 가속기 성능 향상 작업을 하면서 정식 부품으로 교체했지요. 요강 덕분에 16년 동안 고장 한 번 안 일으키고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작년에 최신식으로의 성능 향상을 마치고 올해 3월부터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방사광가속기를 보기 위해서 13일 경북 포항시 남구 효자동 포항가속기연구소를 찾았다. 1995년 가동을 시작한 국내 최초의 가속기인 포항방사광가속기는 이제 3세대 방사광가속기로는 세계 최고 성능을 갖추게 됐다. 가속기 건설부터 관여해온 고인수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가 선형가속기 한쪽 끝을 가리키며 “첨단 가속기를 무사히 가동할 수 있었던 건 옛날 어른들이 화장실 대신 사용했던 요강 덕분”이라며 웃었다. 최첨단을 자랑하는 가속기에 스테인리스 요강이라니, 그동안 포항방사광가속기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 전자총 방전 문제 ‘요강’으로 해결

올림픽 열기로 뜨거웠던 1988년은 고 교수를 포함해 가속기 건설 원년 멤버로 참석한 과학자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 시절엔 ‘가속기’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었어요. 명함에 ‘가속기(accelerator)’가 적힌 걸 보곤 ‘자동차 엔진을 연구하시는군요’라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가속기 불모지였던 우리나라가 우리 기술로 가속기를 지으려고 하다 보니 모든 일이 ‘산 넘어 산’이었다. 문제가 발생하면 하나하나 연구하면서 해결해야 했다. 요강을 사용한 것도 연구원들의 기지 때문이다. 포항방사광가속기는 선형가속기에 있는 전자총에서 전자빔을 내보내 속도를 올린 뒤 저장링(원형가속기)으로 보내 원운동을 시켜 방사광을 얻는다. 고 교수는 “전자총에서 방전이 일어나 전자빔을 제때 내보내기 어려웠다”면서 “방전을 없애려면 전자총 주변을 금속구로 감싸면 되는데, 마땅한 금속구가 없던 차에 시장에서 스테인리스 요강을 사와 가운데를 드릴로 뚫어 썼더니 완벽하게 작동했다”고 회상했다.

○ 故 박태준 명예회장의 야심작

포항방사광가속기는 작년 12월 13일 별세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박 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없었더라면 가속기 사업은 아예 시작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일본 출장 중 쓰쿠바에 있는 고에너지물리연구소(KEK)를 시찰했고 그곳에서 대규모 연구시설 건설과 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첨단기술에 큰 감명을 받았다. 박 회장은 1986년 문을 연 포항공대(현 포스텍)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가속기가 꼭 필요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가속기 건설에 투입된 1500억 원 중 864억 원이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나왔다. 포항제철 내부에서는 ‘용광로는 철광석을 부어 넣으면 돈이 나오지만 방사광가속기에는 돈을 부어 넣으면 나오는 게 빛밖에 없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하지만 박 회장의 강력한 의지에 눌려 반대의 목소리는 수그러들었다. 고 교수는 “박 회장은 가속기 건설 현장을 1년에 서너 차례 찾을 정도로 애정이 많았다”면서 “교수들에게는 항상 깍듯이 존댓말을 쓰며 존경심을 표했다”고 말했다.

○ 땅 많이 사둔 게 4세대에 도움

“4세대 방사광가속기를 지을 수 있게 된 것도 가속기를 처음 설계할 당시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고 교수는 4세대 방사광가속기사업단장도 맡고 있다. 2014년 완공되는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현재 3세대 방사광가속기보다 100억 배 밝은 빛을 만들어낸다. 선형 모양으로 길이가 1.2km에 이른다. 고 교수는 “3세대 방사광가속기를 설계할 때 선형가속기 대신 부스터를 넣었다가 중간에 선형가속기로 설계를 변경했다”면서 “이미 선형가속기를 구축해본 만큼 4세대를 지을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용지를 넉넉히 사둔 일도 큰 도움이 됐다. 약 30만 m²(약 9만 평)면 충분했지만 포항제철의 조언으로 약 72만 m²(약 22만 평)를 사둔 덕분에 그 자리에 4세대 가속기를 넣을 수 있게 됐다. 고 교수는 “중국 상하이는 3세대 방사광가속기 옆에 공간이 600m밖에 없어 4세대 가속기 설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 방사광가속기 ::

전자를 빛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여 다양한 파장과 광도의 빛을 생산하는 가속기. ‘빛 공장’이라고도 불린다. 이 빛을 활용하면 일반 현미경으로는 볼 수 없는 미세한 세포와 금속물질의 움직임과 표면구조, 분자구조를 볼 수 있다.

포항=이현경 동아사이언스 기자 uneasy75@donga.com
#방사광가속기#요강#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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