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의 쫄깃한 IT]흔적 남기지 못하는 여자 접속하지 못하는 남자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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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부탁이 있어!”

최근 데뷔한 한 여성 아이돌 그룹 멤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는 대뜸 자신의 과거 남자친구에게 공개 ‘영상편지’를 보내려 합니다. 다시 애틋한 감정이 생겨서? 못 다한 얘기가 있어서? 다 아닙니다. 이어진 그의 말은 ‘개그’가 아닙니다. 꽤 진지한 부탁입니다.

“전에 우리 함께 찍은 사진 있잖아…그거 조용히 없애줘….”

미니홈피 속 ‘과거’를 지워달라는 부탁. 함께 찍은 사진이 혹시라도 인터넷에 유출된다면? 인기 하락은 물론이고 활동마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죠. 이 그룹 멤버는 이 부탁을 하며 이전 남자친구에게 해맑은 미소를 띠었지만, 마음은 아마도 새카맣게 타들어가지 않았을까요.

그런가 하면 한 5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은 데뷔 전 흡연과 음주를 한 사진이 미니홈피에 버젓이 올라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데뷔 당시 멤버 모두 10대인 점을 감안하면 팬들에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갔을지 모릅니다. 이 때문에 데뷔하자마자 ‘막장 아이돌’이라는 별명까지 얻기도 했죠. 한 여자 가수는 성형 전 사진이 미니홈피에 올라와 곤욕을 치르기도 했죠.

“전에 남자친구가 있었던 게 뭐 어떻다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건 개인 취향 아냐?”라고 ‘쿨’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애정지사, 타인의 밤 문화…어찌 보면 지극히 개인지사니까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온라인 공간에서 벌어진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이미지를 먹고 사는 연예인, 특히 10대 청소년들 팬이 대다수인 아이돌 스타일수록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지죠. 그래서 이들에게 정보기술(IT), 온라인 공간은 무대보다 더 무서운 공간으로 여겨집니다. 지금은 대중 스타가 미니홈피, 블로그 등 IT 문화를 멀리 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사실 대중 스타와 IT의 관계가 처음부터 얼어붙은 건 아닙니다. 실시간 소통 공간으로 주목받았을 때도 있었죠. 하지만 나날이 기술을 업그레이드 해 스타의 미니홈피를 해킹하거나 일기 속 발언 한 줄에 의미를 부여해 여기저기 퍼 나르는 누리꾼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 일어난 ‘2PM 박재범 사태’도 오프라인 속 세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대다수입니다. 데뷔 전 힘든 상황을 탄식하는 글귀를 자신의 미니홈피에 올렸고, 이것이 최근 발각돼 활동을 중단하는 사태까지 빚어졌죠.

오늘도 스타들은 온라인 속 자신의 과거를 지우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한 기획사 매니저는 “데뷔 전 아이돌 가수들 인성 교육을 실시하면서 소위 ‘싸이질(미니홈피 활동)’을 못하게 교육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매니저는 “과거마저 현재이길 바라는 팬들의 집착이 갈수록 커진다”라고 토로했습니다.

한 줄의 일기마저 조심스러운 연예인들의 IT 공간. 스타들이 하나둘 이 공간을 떠나는 현실은 어찌 보면 너무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는 우리 ‘팬덤’의 자화상 아닐까요. 이런 연예인들을 보면서 ‘리쌍’의 히트곡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가 오늘따라 ‘흔적 남기지 못하는 여자, 접속하지 못하는 남자’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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