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사회의 새좌표]경제학/노동가치에서 정보가치로

  • 입력 2000년 4월 24일 19시 04분


인간의 경제행위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지만 경제학의 역사는 기껏해야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역사와 그 궤적을 같이한다. 250여 년 전 아담 스미스가 탄생시킨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그후 자본주의 산업사회와 부침을 같이했고, 위기마다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며 새로운 학파와 패러다임으로 나타났다.

20세기 경제학의 지형도를 단순화시키면 신고전파 경제학, 케인스 경제학 등으로 이어져온 ‘근대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경제학’의 양대 산맥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자본주의 산업사회를 분석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경제학 발전에 함께 기여했지만 현실공간에서의 경제행위만을 분석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아날로그 시대의 경제학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디지털시대의 도래와 함께 기존의 경제학은 이전의 학문적 위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이전에는 적어도 ‘희소성의 법칙’이나 ‘수확체감의 법칙’ 같은 근본원리가 부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디지털경제 하에서는 ‘풍요의 법칙’과 ‘수확체증의 법칙’이 ‘희소성의 법칙’과 ‘수확체감의 법칙’을 대체한다. 가상공간에서의 가치는 희소성에서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요함에서 창출되고, 특정 생산요소의 과잉투입으로 인해 생산의 효율성이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의 중심 축인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노동가치론’이 잉여가치법칙을 관철시키는 부동의 근본원리였다. 그러나 디지털 경제 하에서는 ‘노동가치론’ 대신 ‘정보가치론’ 혹은 ‘지식가치론’이 제기된다. 지식기반경제 하에서 가치창출의 주된 동인은 ‘노동’이 아니라 ‘지식’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기존 경제학의 근본원리에 대한 회의로 인해 경제학 이론 전반에 걸쳐 해명해야 할 새로운 이슈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이슈는 경제행위 공간의 변화와 관련된 논의다. 즉, 네트워크화된 디지털 가상공간에서의 경제행위와 기존의 아날로그 현실공간에서의 경제행위의 차이는 무엇이며,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해명의 출발점은 가상공간에서의 가치창출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가상공간에서의 경제행위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잣대가 마련돼야 한다. 오늘날 경제의 서비스화 소프트화 글로벌화가 가속되면서, 혹자는 ‘주목(attention)’이 새로운 가치측정의 잣대라 주장하고 혹자는 ‘정보’나 ‘지식’이 그 잣대라 주장한다.

디지털 경제의 두 번째 이슈는 경제행위 주체의 변화와 관련된 논의다. 주지하듯이 경제행위의 주체는 인간이다. 아날로그 경제에서 소비의 주체인 가계와 생산의 주체인 기업, 공공의 주체인 정부의 경제행위는 시공간적으로 분리돼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 경제 하에서는 경제주체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시공압축의 가상공간에서는 소비자이면서 생산자인 산비자(prosumer)가 무체물(無體物)인 비트(bit)상품을 거래한다.

또한 가상국가가 등장하고 디지털 신흥 자본가와 같은 가상지배계급이 계급구조의 지형도를 새롭게 그리고 있다. 생명공학의 발달로 사이보그나 복제인간이 현실화되면 노동양식 역시 노동의 종말과 노동개념의 변화를 포함하는 일대변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 ‘경제주체로서 인간은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할 것인가’도 경제학의 주요 문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이슈는 디지털 경제의 지향점과 관련된 논의다. 디지털 경제는 가상공간조차 경제활동 영역으로 편입하면서 자본주의 경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더욱 고도화시키고 있다. 디지털 경제를 촉진하는 승자독식(winner-take-all)의 무한경쟁원리는 부의 양극화와 금융의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킨다.

이 경우 디지털 경제는 오히려 자신의 모태인 자본주의를 붕괴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기존 경제학은 카오스 이론, 복잡계 경제학, 진화 경제학 등의 새로운 시도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경제가 제기하는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 아직 명쾌한 해명을 하지 못한다.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모험적 항해를 시도했듯이, 이 시대의 경제학은 광속으로 변화하는 디지털 경제의 지형도를 판독하기 위해 새로운 경제원리를 찾아 대탐험을 감행하고 있다.

김종한(경성대 경제통상학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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