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대]내 스케줄따라 세상을 맞춘다

  • 입력 2000년 4월 6일 19시 38분


“99년 내 일정표를 본다면 사람들은 나를 ‘세월 좋은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1년 내내 스위스의 휴양지와 지중해의 해변, 그리고 남미의 별장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대학의 연구소에 있던 시간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구보다 많은 사무를 처리하고 비즈니스를 해왔다. 인터넷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트워크는 일정한 시간에 출퇴근 하는 획일적 일상을 파괴할 것이다. ” 지난달 방한한 니컬러스 네그로폰테 교수(미국 MIT미디어연구소장)이 남긴 말이다.

그의 말대로 수천년간 인류를 지배해온 시간의 개념은 지금 획기적으로 바뀌고 있다. 시간은 역사이래 지배자의 ‘소유’였다. 지배자들의 연호와 역법은 세상 사람의 생활을 통제했다. 그러나 이제는 디지털이 그 ‘지배자’의 위치에 올라 있다. 21세기 디지털 혁명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시간 개념을 뒤흔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TV프로도 형편대로 시청▼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난 디지털 인류〓디지털 혁명은 시간이라는 굴레를 과감히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인터넷의 쌍방향성(인터랙티브)과 네트워크의 결집력이 강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앞으로 펼쳐질 디지털방송 시대에는 방송국이 정한 편성시간은 의미를 갖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인기드라마를 시청하기 위해 시간에 맞춰 TV 앞에 앉지 않아도 언제든지 시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시청자가 편성 담당자가 될 수도 있다. 아침식사 시간에는 뉴스, 몸이 나른한 오후에는 음악프로그램, 저녁에는 영화가 시작되도록 스스로 편성표를 짤 수 있으며 때로는 드라마의 진행방향까지 시청자의 입맛에 맞게 고칠 수 있다.

드라마상에서 두 명의 여자와 삼각관계인 남자 주인공이 누구를 선택하느냐를 작가가 아닌 시청자가 결정하는 일은 벌써 시작됐다. 이미 네티즌을 상대로 한 인터넷영화 또는 인터넷드라마에선 이같은 일이 시도되고 있다.

신문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어제 발생한 뉴스를 읽기 위해 신문이 배달되는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모든 신문사들이 웹사이트에 인터넷판 신문을 서비스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인터넷에 접속하면 그때 그때의 원하는 분야의 최신 뉴스를 접할 수 있다. 요즘에는 PDF서비스 덕분에 실제 종이신문 지면과 동일한 편집상태로 신문을 읽는 일도 가능해졌다. 앞으로는 밤새 원하는 분야의 뉴스만 골라 컴퓨터에 저장해놓고 화면만 켜면 바로 뉴스를 볼 수도 있게 된다.

디지털 혁명은 24시간 리얼타임(real time)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직원들이 퇴근한 한밤중에도 E메일로 문의 또는 불만을 제기할 수 있고 책을 사고 싶으면 어느 때라도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된다. 공급자가 정한 시간대에 맞춰 움직이지 않아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네트워크 세상에서는 이처럼 쌍방향성 때문에 일방통행이란 있을 수 없다. 수요자가 원하는 바를 쫓아가지 못하는 ‘일방적인’ 공급자는 몰락할 수 밖에 없다. 정보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사회는 계속 발전한다.

24시간 리얼타임 시대에는 신속한 정보의 습득과 판단이 성공의 열쇠로 작용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속도는 기업 경영자들의 관념속도를 앞서가고 있으며 경영자들은 자신의 생체시계를 리얼타임에 맞춰야 생존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정보화 덜 된 곳이 먼나라▼

▽가까운 나라, 먼 나라〓유니텔에 근무하는 김한준씨(29)는 예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 여러명이 현재 수천㎞ 떨어진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가끔씩 사이버공간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다. 그는 일상 업무를 인터넷을 통해 처리하기 때문에 항상 출근과 동시에 PC를 회사 의 근거리통신망(LAN)에 연결시켜놓고 근무한다. 네트워크에 연결된 그의 PC는 친구들의 인터넷 접속을 자동통보해준다. 미리 입력된 ID가 인터넷에 맞물리면 접속 사실을 알려주는 프로그램 덕분이다.

김씨는 “외국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면서 “국내에 있는 친구나 외국에 나간 친구나 연락하는 빈도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에는 ‘가까운 나라, 먼 나라’를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진다. 즉 ‘우리나라와 몇시간의 시차가 발생하느냐’가 기준이 아니라 정보 인프라의 수준이 잣대로 작용한다. 인터넷 사용인구가 많고 네트워크가 잘 구축된 나라는 거리에 상관없이 가깝게 느껴지는 반면 그렇지 못한 나라는 아무리 거리가 가깝더라도 먼 나라일 수 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주식투자 열풍이 불면서 우리나라 투자자들이 매일 밤 미국 나스닥에 눈과 귀를 기울이는 것도 시간의 장벽이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태양이 지지않는 인터넷 세계▼

▽모호해지는 낮과 밤의 경계〓일상의 낮과 밤 구분은 하늘에 태양이 떠있느냐 아니냐에따른 것. 그러나 사이버공간은 낮과 밤의 구분이 없고 오히려 밤이 될 수록 더욱 활기가 넘쳐난다. 인터넷서비스회사들에 따르면 하루 가운데 가장 접속량이 많아 컴퓨터 시스템에 부하가 많이 걸리는 시간대는 자정부터 새벽 1시 사이. 시간이 갈수록 차츰 접속량이 감소하지만 새벽내내 사이버공간을 돌아다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천리안의 황보순씨는 “채팅 및 각종 사이버동호회 활동을 통해 사이버공간에서 낮과 밤의 구분 없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지니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인간관계가 넓혀가는 네티즌들이 계속 늘고 있다”면서 “사이버공간의 대표적인 인간관계인 채팅을 통해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최고단계인 결혼에 골인했다는 얘기는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성동기기자>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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