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국내 유류업계 현주소

  • 입력 2003년 5월 6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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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전쟁이 종결되면서 치솟았던 원유값이 안정을 되찾고 석유수급에 대한 불안감도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국제 에너지 질서 재편전쟁’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내의 석유 질서는 어떨까? 국내 정유업체들은 대내외 악재가 겹치면서 비틀거리고 있다.》

▽정유업계 “좋은 시절은 끝났다”=현재 한국 정유업체의 ‘메이저’는 SK㈜ LG칼텍스정유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인천정유 등 5개사.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정유업계는 정부의 허가제 우산 속에서 연평균 18%의 고성장을 구가했다. 97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이후 개방화를 서두르던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석유류 가격 및 수출입을 자유화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외환위기로 소비가 침체된 데다 해외 덤핑시장에서 사들인 석유제품을 싸게 푸는 석유수입사의 공세로 정유업체들의 경영상태는 급속히 악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99년부터 인수합병(M&A)이 가속화돼 오일뱅크의 지분 50%는 아랍에미리트(UAE)의 국영투자회사가 사들였고 쌍용정유의 지분과 경영권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사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에 매각됐다.

결국 정유업계는 2000년에 2194억원, 2001년에는 2377억원의 연속 적자를 냈다. 지난해 업계 전체가 7654억원의 이익을 냈지만 대부분은 환차익에 의한 것.

▽새로운 도전들=수입자유화 이후 해외 덤핑시장에서 싼 값에 석유제품을 사들여오는 수입업체들의 공세는 매서웠다. 97년 1개에 불과했던 수입업체는 2000년 21개, 2002년에는 41개로 늘었고 지난해 하반기에 시장점유율을 10%까지 높였다. 이러다보니 국내 정유업체들은 남아도는 생산량을 국제 현물시장에 울며 겨자먹기로 내다팔고 있다.

LNG LPG 등 가스제품의 소비가 크게 늘면서 벙커C유, 중유 등 중질유(重質油)의 소비를 잠식하고 있는 것도 문제. 남아도는 중질유를 다시 정제해 휘발유, 등유 같은 경질유로 만드는 중질유 분해시설을 갖추는 데 업계 전체가 7000억∼1조원을 투자해야 한다.

최근 대기환경보전법이 개정돼 2006년 1월까지 ‘유로4’ 기준에 맞춰 경유의 황 함유량을 대폭 낮춰야 하는 것도 큰 부담이다. 추가 설비투자만 1조5000억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대한석유협회 안병원(安秉遠) 회장은 “정유업계 전체의 영업이익이 급속히 줄고 있어 석유 무기화에 대비해 국가별로 정제시설을 갖춘다는 ‘소비지 정제주의’를 지켜가려면 정부 차원에서 특단의 배려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석유세금이 국방비를 초과=지난해 한국의 평균 휘발유값은 L당 1267원으로 OECD 회원국 평균 905원보다 훨씬 높았다. 이유는 높은 세금 때문이다.

휘발유값의 70%는 부가가치세 특별소비세 교통세 교육세 주행세 등 세금이며 관세와 정부부과금을 합하면 85%가 국고로 들어간다. 정부가 지난해 석유와 관련해 거둬들인 세금은 17조원으로 국세 중 석유류 세금이 차지한 비중은 16.8%. 국방예산(16조원)을 넘는다.

하지만 정부는 세수감소를 우려해 관세와 각종 세금의 인하를 주저하고 있다. 또 각종 원재료에 1% 미만의 관세를 매기는 것과 달리 한국은 원유에 유독 5%의 높은 관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SK㈜의 황두열(黃斗烈) 부회장은 “원유수입에 관세를 매기지 않는 대만이나 중국, 1%인 일본에 비해 한국의 정유업체는 대단히 불리하다”고 주장했다. 휘발유 등 완제품의 수입관세는 7%.

▽어두운 미래=올 들어 정유업계 전체 매출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1위업체 SK㈜가 SK글로벌 사태와 맞물려 어려움을 겪고 있다. SK㈜는 국제 메이저나 산유국의 지분이 큰 다른 정유업체와 달리 민간 정유업체로는 유일하게 해외 유전개발 노력을 기울여왔다.

해외 에너지개발은 성공률이 1%에 불과한 ‘모험산업’이다. 한국의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꼭 필요한 투자지만 기업의 이익에는 도움이 안 된다. 최근 SK㈜의 1대 주주로 올라선 해외자본 크레스트증권이라면 이런 ‘무모한’ 투자에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정유업체들이 경쟁력을 잃으면 장기적으로 소비자들은 더 비싼 석유를 쓸 수밖에 없어진다. 이 때문에 정부가 일관된 에너지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이상곤(李相곤) 원장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제시한 10대 국정과제에서 에너지 관련 부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면서 “석유산업의 국가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정부는 중장기적인 ‘에너지 안보체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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