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288…손기정 만세! 조선 만세!(16)

  • 입력 2003년 4월 9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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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뭔가를 전하고 싶다면, 꿈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다음에는 목이 잘려나갈 것인가? 우철은 망막에 각인되어 있는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엇을 전하려는 것인가? 남자의 눈, 입, 목, 손, 손에 쥐고 있는 장도칼, 장도칼이다! 꿈속에서는 주의 깊게 보지 않았지만, 손잡이에 용무늬가 있었다. 틀림없다, 그것은 아버지가 매일 아침 사용했던 장도칼이다. 내가 철이 들었을 때는 손잡이가 벌써 누♬으니까, 아버지가 밀양으로 흘러들기 훨씬 전부터 애용했던 것이리라. 아버지, 장도칼을 어떻게 해달라는 겁니까? 유골처럼 밀양강에 던지면 됩니까? 우철은 임종 당시 아버지의 혀 위에서 몸부림치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써라.

어디 있습니까?

반다지다.

우철은 부엌에서 호롱불을 들고 와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사랑방에 들어가 반다지 문을 열자, 있었다! 장도칼은 반다지 바닥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우철은 호롱불을 우물가에 내려놓고, 대야 물에다 장도칼을 넣고 흔들었다. 호롱에 기름이 다 떨어져 불이 꺼졌다. 물에서 장도칼을 꺼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 무얼 하면 되는지는 손이 알고 있었다. 쓱쓱 쓱쓱 쓱쓱, 칼 가는 소리가 울리는 공간과, 벌레 소리가 울리는 공간이 같은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귀뚤귀뚤 쓰르람쓰르람 찌르르르, 나의 일부는 지금도 그 꿈속에 포함되어 있고, 그 남자의 일부는 이 현실 속에 포함되어 있다. 내가 꿈속에서 그 남자를 보았던 것처럼, 그 남자 역시 장도칼을 가는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장도는 달빛을 반사하며 빛나기 시작했지만, 우철은 칼 가는 동작을 멈출 수가 없었다. 쓱쓱 쓱쓱.

첫닭이 울자 동시에, 면 셔츠와 바지로 옷을 갈아입은 우근이 마당으로 나왔다. 늦잠을 자면 그냥 두고 간다는 약속을 하고서 달리기 시작한 지 열아흐레가 되는데, 아직 그 약속은 깨지지 않았다. 양화점에 우철이 신고 있는 것과 똑같은 운동화를 특별히 주문했지만, 일주일은 걸린다고 하여, 그때까지는 작업화를 신고 달릴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다른 가족이 깰까봐 소리나지 않게 라디오 체조를 하고 잰걸음으로 새벽녘의 거리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강둑길에 접어들자 달리기 시작했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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