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하는 손[이은화의 미술시간]〈420〉

  • 동아일보

낡고 빛바랜 도시의 골목길, 한 남자가 서서 누군가를 향해 격렬하게 손가락질하고 있다. 쭉 뻗은 한 손은 정면을, 다른 손은 바깥을 향한다. 크게 벌린 입과 일그러진 미간에는 분노가 서려 있다. 대체 이 남자는 누구이며 그의 손가락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쿠르트 크베르너가 1931년에 그린 ‘선동가’(사진)는 바이마르공화국 말기 독일 사회의 불안과 긴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독일은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아 실업과 빈곤이 일상을 잠식하던 절망의 시기였다. 거리마다 정치적 선동과 좌우 이념의 충돌이 난무했다. 크베르너는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냉정하게 폭로하는 신즉물주의의 시선으로 자신이 속한 시대를 기록했다.

그림 속 배경에는 인물의 뒤로 낡은 벽과 배수관, 희미하게 이어지는 도시 풍경이 보인다. 이곳은 화려한 혁명의 무대가 아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민중의 비루한 터전이다. 크베르너는 특정 정치인을 묘사하는 대신에 당시 거리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었던 시민 선동가의 전형을 그려냈다. 시대의 모순을 견디다 못해 거리로 뛰쳐 나온 이름 모를 소시민의 자화상이다. 과장된 몸짓과 긴장된 표정은 설득과 선동 사이의 위태로운 경계를 드러낸다. 석공 출신으로 공산주의에 공감했던 작가의 정치적 입장과 별개로, 그림은 특정 이념 선전을 넘어 언어가 감정을 자극하고 군중을 움직이는 순간 자체를 포착한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남자가 가리키는 대상은 분노와 불안을 만들어내는 부조리한 사회 구조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 손짓은 우리를 향하고 있기도 하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더 강한 말과 더 단순한 확신에 쉽게 끌린다. 어쩌면 남자의 손가락 끝이 겨누고 있는 것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타인의 확신에 기꺼이 눈과 귀를 내맡기는 맹목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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