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발 메시지의 국내 정치 활용 시도
하이브-쿠팡 등도 美 영향력에 기대
외부 압박 잘못 끌어들이면 역효과만
대미 로비의 잘못된 전례 만들지 말아야
이정은 부국장
한 편의 소극(笑劇)으로 끝난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방미는 한국 정치인의 미국행 역사에서 두고두고 언급될 사례다. 일정이 빡빡한 외교안보 분야 출장자들도 여간해선 일주일을 넘기지 않는 워싱턴 일정을 8박 10일이나 진행했는데 성과는 미스터리다. 우리로 치면 국장급인 국무부 부차관보 등을 만나면서 면담자의 급(級)이 맞는지를 놓고 반박과 재반박을 이어가는 ‘진실게임’은 지켜보기가 민망했다.
방미 과정과 내용, 뒷수습 해명이 모두 논란이 된 문제의 근원은 워싱턴 행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에 있었다고 본다. 백악관과 공화당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 한국의 보수 정당에 힘을 실어주는 메시지를 끌어낸다면 국내 지지층 결집에 도움이 될 것이란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정책 측면에서 영향력이 없다시피 한 지금의 야당 대표가 굳이 J D 밴스 부통령이나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을 만나려 한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주로 보수 쪽에서 활용해온 워싱턴발 메시지가 한국 여론과 정책에 영향을 미친 사례들이 꽤 있었긴 하다. 이념적으로 첨예하게 갈려 있는 대북 문제를 놓고 특히 그랬다. 문재인 정부에서 대북전단금지법을 추진하던 때 미국 의회 내 인권위원회가 이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진행한 청문회의 파급력은 지금도 북한인권 활동가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북한 주민들의 정보 접근권, 자유 같은 보편적 가치가 청문위원들의 날 선 메시지에 힘을 실었다. 다만 이런 명분이 없는 정파적 목적의 접근 시도에는 미국 인사들도 쉽게 응하지 않는다. 장 대표의 방미가 실패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주로 정치 분야에서 시도되던 ‘워싱턴 이용법’이 산업 경제, 사회 문화 분야로 확산하는 듯한 최근 움직임은 더 걱정스럽다. 방시혁 하이브 의장의 출국 금지를 풀어 달라는 요구가 미국발로 경찰에 전달된 것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경로다. 방 의장은 1900억 원대 부당이득 의혹으로 조사를 받고 있는 기업인이다. 이런 인사에게 신변 특혜를 달라는 전례 없는 민원이 정말 하이브의 물밑 작업이나 요청 없이 미국에서 나왔을까.
대미 로비스트들을 대거 동원해온 쿠팡의 접근법은 더 노골적이다. 후원금 등에 힘입어 하원의원 54명에게서 자사를 옹호하는 서한의 서명을 받아낸 건 그렇다고 치자.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의 신변 문제를 한미 안보 분야의 고위급 협의와 연계시키려 한 시도는 너무 나갔다. 기업 총수의 체포나 출국 금지 여부가 동맹과의 핵잠수함 협력 같은 국가적 현안을 앞설 수는 없다. 쿠팡의 경우 김 의장이 미국 국적자이고, 델라웨어에 본사를 두고 뉴욕 증시에 상장한 회사라는 특수성은 있다. 그렇더라도 서울보다 워싱턴에서 더 분주한 쿠팡은 미국이라는 큰형님의 완력을 이용하려 안달 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움직임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한미 관계가 급속히 거래적 성격으로 바뀌면서부터 두드러지는 듯하다. 안보 분야 중심이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 동맹은 경제, 기술 쪽으로 확장하며 굵직하게 얽혀들고 있다. 핵잠수함 도입을 비롯한 방산 협력과 원자력협정 개정 등 설득 혹은 압박 카드로 쓸 프로젝트도 늘었다. 이를 볼모로 잡으려는 시도가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의 개입에도 여러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다. 쿠팡 건만 해도 온라인플랫폼법을 비롯해 미국의 테크 기업에 영향을 미칠 한국의 규제 제동에 지렛대로 쓰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유일한 동맹이자 강대국인 미국의 심장부에서 나오는 메시지의 파워는 여전히 막강하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아무 때나 어느 분야에서나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잘못 끌어들였다간 역효과만 낼 수 있다. 한국의 정책 시스템은 외부의 압박에 마냥 휘둘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다. 주권국가로서 준수해온 법과 원칙은 외부에서 그렇게 쉽게 흔들 수 있는 게 아님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잘못된 전례를 만들 경우 대미 로비나 네트워크를 악용하는 다른 사례들이 나올지 모를 일이다.
다만 양국 관계의 뇌관이 되어 버린 사안을 최대한 신속히 정리하는 일은 한국의 몫이기도 하다. 태스크포스(TF) 인력만 90명에 육박해 과잉 논란을 부른 쿠팡 수사와 “조 단위가 될 수 있다”는 엄포만 놓은 채 하세월로 미뤄지는 과징금 등 관련 조치에 문제는 없는지 점검이 필요하다. 괘씸하다는 감정이나 여론으로 부풀려진 거품을 걷어내고 원칙에 근거한 실질적 조치로 “한국이 미국 기업을 차별한다” 같은 주장이 나올 빌미를 없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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