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시 시가총액에서 ‘반도체 투톱’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43%를 넘겨 50%를 바라보고 있다. 이 수치를 보니 과거 핀란드의 노키아가 떠오른다. 노키아는 한때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40%를 점하던 핀란드의 삼성전자였다. 전성기였던 2007년, 노키아 홀로 핀란드 헬싱키 증시의 시총에서 차지한 비중이 34%를 넘겼다. 이즈음 ‘핀란드 패러독스’란 말이 나왔다. 핀란드는 연구개발(R&D) 투자, 교육 경쟁력이 세계적인 수준인데, 노키아를 빼면 기업 실적이 신통치 않은 역설을 뜻한다. 핀란드 정부는 노키아의 호황에 취해 다른 산업 육성에 소극적이란 지적을 받았다.
비슷한 현상이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작년에 발표된 한국의 2024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비용은 5.13%로, 이스라엘(6.35%)에 이은 세계 2위다. 한국은 R&D 투자를 늘린 지 꽤 됐지만 반도체 기업 외에 증시를 이끄는 기업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교육 경쟁력 역시 우수한 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한국 학생들의 기초 학력 수준은 높다. 우리가 사교육, 교육정책에 들이는 돈과 사회적 비용을 생각해 보자. 한국판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나 오픈AI의 샘 올트먼이 벌써 나왔을 일이다. 현실에선 부를 대물림받는 대기업들이 시장을 이끈다. 한국에서도 ‘코리아 패러독스’란 말이 힘을 얻을 법하다.
잠재성장률이 떨어지고 있어 다양한 혁신 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OECD에 따르면 한국 잠재성장률은 지난해 1.92%에서 올해 1.71%로 하락하고, 내년에는 1.57%로 또 떨어진다. 반도체가 이끄는 한국 수출은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는데 잠재성장률은 최저치를 경신하니 아이러니하다.
우리 반도체 기업을 노키아와 같으리라고 볼 수는 없지만 언제든 침체기가 올 수 있는 일이다. 이럴 때를 위해 특정 기업 의존이 클 때의 여파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07년 애플의 아이폰이 나오며 노키아의 휴대전화 시장이 붕괴하자 핀란드 무역 수지는 줄줄이 적자였다. 2013년 노키아 매각을 전후해 핀란드 경제는 3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 갔다.
코리아 패러독스를 해결하려면 핀란드가 노키아의 몰락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핀란드의 해법은 창업과 중소기업 육성이다. 핀란드 정부는 낡은 법과 제도를 뜯어고치고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맞게 교육의 틀도 바뀌어야 한다. 교육 경쟁력이 높은데 빅테크 창업자가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교육의 방향이 잘못됐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학생들은 과도한 국영수 중심의 교육으로 기초 성적은 뛰어나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에서 정보를 평가하고 분석하는 능력이나 AI 활용에 핵심적인 자기주도학습 능력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6 동아국제금융포럼에서 기조 연사를 맡을 2025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피터 하윗 미 브라운대 교수 역시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혁신적인 인재를 키우려면 ‘도전하는 태도’를 가르치라고 제안했다. 반도체 호황에 취해 다른 산업을 육성할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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