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21세기 석유’ 핵심광물 공급망 재편 중
中 배제 위해 최저가격 설정해 이하엔 관세
생산자 日은 웃지만 소비자 韓은 원가 올라
비축 넘어 생산자 지위 확보에 총력 다해야
허정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1973년 10월 중동 산유국들의 석유 수출 금지 조치로 한국 경제는 치명적인 오일쇼크를 겪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로 움직이던 공장들이 멈췄고, 물가는 폭등했으며 성장의 엔진마저 꺼질 뻔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유사한 위기가 다른 얼굴로 다가오고 있다. 이번에는 핵심광물이다. 리튬, 코발트, 희토류, 갈륨, 흑연 등은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방산 장비, 풍력 터빈에 이르기까지 21세기 첨단산업 전반을 떠받치는 원료다. 현재 이 광물들의 채굴·정제·가공 시장은 중국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희토류 정제의 91%, 흑연 가공의 90%, 갈륨 생산의 98%가 중국에서 이뤄진다. 지금 미국이 이 공급망 구조를 강제로 재편하고 있다.
2026년 2월 미 국무부 청사에서 핵심광물의 글로벌 공급망 판도를 뒤집는 선언이 나왔다. J D 밴스 미 부통령은 54개국과 유럽연합(EU) 대표단을 핵심광물 장관급회의에 초청해 “생산 단계별(채굴·정제·가공) 기준가격을 설정하고, 이를 하회하는 수입품에는 조정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즉, 핵심광물 가격하한제(Price Floor)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중국의 전략이 있다. 중국은 수십 년간 국가보조금으로 세계 시장가격 이하로 광물을 공급하며 호주, 캐나다, 유럽의 채굴·정제 기업을 경쟁에서 밀어낸 결과로 시장을 장악했다. 이번 선언은 광물의 최소 가격선을 설정하고, 그 이하 가격에는 관세를 부과해 중국산을 사실상 배제하겠다는 의미다. 미국은 이를 위해 ‘포지 이니셔티브’(FORGE·Forum on Resource Geostrategic Engagement·지전략적 자원협력 포럼)라는 55개국 핵심광물 무역블록을 공식 출범시켰다. 한국은 FORGE의 초대 의장국을 맡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새 질서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는 나라 중 하나다.
문제는 FORGE 55개국이 겉으로는 같은 편이지만, 실제 이해관계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호주, 캐나다, 아프리카 자원국들은 광물을 파는 나라다. 가격하한제가 도입되면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으니 수혜자가 된다. 일본은 수십 년간 전 세계 광산에 투자했고, 핵심광물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 지위를 확보해 가고 있다. 미국과 2025년 10월 핵심광물 협약을 맺어 이미 이행 단계에 들어갔고, 최근에는 미나미토리섬 인근 심해 희토류 공동개발에 합의했다. 광산 지분을 통해 생산 수익도 확보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가격하한제로 광물 가격이 오르더라도 원가 부담의 일부를 상쇄할 수 있다.
한국은 다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배터리와 반도체를 만들지만, 원료는 대부분 외부에서 조달하는 순수 소비자에 가깝다. 배터리 가격의 70∼80%가 리튬, 코발트, 흑연 등 원재료 비용에서 발생한다. 만약 가격하한제로 이 광물 가격이 오르면 그 부담은 그대로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의 원가로 직결된다. 같은 FORGE 블록 안에서도 일본은 웃고, 한국은 울 수 있는 구조다.
반도체 분야의 충격은 또 다르다. 갈륨, 이트륨, 세리아 같은 희토류는 사용량 자체는 적지만, 없으면 반도체 공정 라인 전체가 멈춘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수출 통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생산하는 첨단 반도체에 중국산 희토류가 극소량이라도 포함되면, 어느 나라로 수출하든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할 수 있다. 이는 공급망 리스크를 넘어 산업 주권의 문제다.
우리 정부는 올 2월 희토류 17종 전체를 핵심광물로 지정하고 ‘희토류 공급망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비축 물량을 두 배로 늘리고, 해외자원개발 융자 비율을 높이며, ‘팀 코리아’를 구성해 민관이 함께 광산 투자에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이 방향 자체는 옳다. 그러나 일본처럼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 위치를 확보하는 구조적 전환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기·중기·장기 전략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국가적 인내심이다. 단기적으로는 FORGE 협상에서 제조국 보호 조항과 보조금 연계를 반드시 끌어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단순한 투자 선언에 그치지 말고, 일본처럼 핵심광물 생산자 지위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초장기적으로는 광물을 덜 쓰는 기술과 대체 소재 개발에 대규모 연구개발(R&D)을 집중해야 한다.
핵심광물은 21세기의 석유다. 1970년대 오일쇼크가 에너지 정책을 국가 의제로 만들었듯, 지금은 핵심광물 문제를 국가 경제안보 의제로 격상해야 할 때다. 충격은 이미 시작됐다. 문제는 우리가 이를 위기로만 맞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산업 전략의 전환점으로 만들 것인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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