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상승률 ‘2%’ 스위스의 비결[조은아의 유로노믹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24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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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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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167년 역사의 글로벌 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가 문을 닫으며 ‘금융 강국’의 자존심을 구겼던 스위스가 모처럼 떳떳해질 법한 뉴스가 나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중동전쟁이 불거진 뒤 ‘스위스프랑’ 몸값이 뛰었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스위스프랑 강세보다도 일찍이 더 주목받은 건 스위스의 물가다. 지난해 스위스 물가상승률은 2.8%. 올해도 2%대를 유지하다가 내년 물가는 1%대 오르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위기가 불거지며 여전히 ‘고물가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대비된다. 스위스만 ‘인플레 무풍지대’에 안착한 비결은 무엇일까.

물가상승률, EU 평균치의 ‘4분의 1’

우선 스위스의 물가 상승률을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보자. 글로벌 리서치 전문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올 6월 유럽연합(EU) 기준 물가지표인 HICP는 스위스에서 1.8%였다. 이는 EU 회원국 평균치(6.4%)의 약 4분의 1 수준이다. 유럽의 경제 강국인 독일(6.8%), 프랑스(5.8%)에 비해서도 훨씬 낮다.

물론 여행객들 사이에서 스위스 물가는 워낙 높다고 알려져 있다.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는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이 발표하는 ‘10대 고물가 도시’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올 1월 발표한 빅맥지수를 보면 스위스 빅맥은 6.7프랑(약 1만103원)으로 1위였다. 미국은 5.36달러(약 7200원)로 그 뒤를 이었다.

스위스 물가가 워낙 높긴 하지만 물가 상승률이 낮은 건 생활에 큰 안정성을 준다. 이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들은 스위스 물가 안정성의 비결을 궁금해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스위스는 물가 산정 방식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다르기 때문에 물가가 낮게 측정되는 측면이 있다. 독일 베텔스만 재단이 운영하는 글로벌 이코노미 다이내믹스(GED)에 따르면 스위스에서는 물가 산정 대상 가운데 운송 비용 비중이 낮은 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특히 급등한 연료 가격의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저물가의 대표적인 비결은 앞서 언급한 스위스프랑 강세다. 24일 기준 1스위스프랑은 1.12달러가량이다.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전반적으로 상승세를 이어오다가 올해 9월 전후 주춤했는데 이달 들어 중동지역 긴장이 고조된 뒤 다시 올랐다. 스위스는 중립국인 데다 에너지 공급이 안정적이어서 전쟁 국면에서 스위스 화폐가 안전자산으로 떠올랐다는 분석이 나온다.

스위스프랑의 강세는 해외에서 스위스로 수입되는 제품 가격을 낮추기 때문에 스위스 물가를 완화시킨다. 물론 스위스로선 고민도 있다. 스위스에서 생산된 제품이 수출될 때 가격이 비싸지기 때문에 수출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엄격한 가격 통제 정책


스위스 당국은 에너지뿐 아니라 일반적인 상품 및 서비스 가격을 엄격히 통제한다. 물가가 평소 꾸준한 관리를 받게 되는 구조다. GED에 따르면 당국이 물가 산정 대상에 포함하는 상품 가운데 약 3분의 1이 가격 규제를 받는다. 이는 유럽 국가들 가운데 이례적으로 높은 편이라고 GED는 설명했다. 당국의 규제에 따라 기업들은 제한된 기간에만 가격을 조정할 수 있다. 스위스 물가는 원자재 가격의 단기 변동에 출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물가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에너지가격이 안정돼 있다는 점도 상당한 역할을 한다. 스위스는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낮다. 산악 지형과 1500개가 넘는 호수 덕에 수력 에너지가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편이다. 여기에 에너지기업이 프랑스 등과 달리 애초에 국유화돼 있다는 점도 저물가의 비결로 꼽힌다. 국가의 에너지 정책 기조에 맞춰 가격이 안정적으로 유지됐다는 얘기다.

스위스 소비자들이 워낙 부유하기 때문에 물가 변동이 크지 않은 측면도 있다. 미국 CNBC는 스위스인들이 부유한 편이라 전체 지출 중 음식 등 필수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아 체감 물가 변동이 크지 않다고 설명했다.

스위스의 높은 노동생산성도 상품가격을 낮춘다는 분석이 있다. 상품을 생산하는 데 적은 인건비가 투입되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지난해 1월 보고서에 따르면 스위스의 노동생산성은 OECD 회원국 중 1위였다.

“인플레 전쟁, 안 끝나”

스위스중앙은행(SNB)은 물가 관리 목표치인 2%를 달성한 만큼 긴장을 늦출 법하다. 하지만 여전히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SNB는 지난달 금리를 연 1.75%를 동결한 뒤에도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토마스 조던 SNB 총재는 미국 CNBC와의 인터뷰에서 “인플레이션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며 “앞으로 몇 달 동안 인플레이션이 어떻게 될지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SNB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워낙 세계적으로 에너지가격이 불안정하고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임대료 상승세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조던 총재는 스위스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제조업이 약하다는 점도 언급했다. 경기 침체가 닥칠 경우 대규모 고용을 일으키고 후방 산업을 떠받칠 수 있는 제조업이 약하니 타격이 더 클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에서 불거지는 경제 이슈가 부쩍 늘었습니다. 경제 분야 취재 경험과 유럽 특파원으로 접하는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 유럽 경제를 풀어드리겠습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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