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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국제

징집버스 앞 생이별… 아빠를 놓지 못했다

입력 2022-09-24 03:00업데이트 2022-09-24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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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동원령 후폭풍]
푸틴 동원령에 징집 시작… 눈물 흘리는 러시아
“꼭 돌아와” 어린 딸 울음 터뜨려
하루만에 러 전역서 1만명 징집
22일(현지 시간) 러시아 동부 사하공화국 야쿠츠크에서 한 남성이 입영소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기 전 가족으로 보이는 여성과 부둥켜안고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전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예비군 동원령’을 내린 뒤 러시아 전역에선 ‘생이별’이 이어졌다. 텔레그램 영상 캡처
22일(현지 시간) 러시아 동부 사하공화국 야쿠츠크시 네튠그리 마을에는 군 입영센터로 가는 버스가 서 있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예비군 동원령에 의해 징집된 한 러시아 남성이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버스 창밖으로 상반신을 내밀었다. 부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버스 앞으로 뛰어와 까치발을 한 채로 그와 긴 포옹을 했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 동원령을 내린 지 하루 만에 러시아 전역에서 징집 절차가 시작됐다. 하루아침에 가족과 연인을 전쟁터로 떠나보내게 된 러시아인들은 ‘생이별’ 위기에 놓였다.

이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온라인에서는 입영을 앞두고 가족들과 마지막일 수도 있는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담긴 동영상과 사진이 쉼 없이 올라왔다. 전날 저녁 러시아 다게스탄공화국 수도 마하치칼라에서는 한 공터에 몰려 있던 시민 수십 명이 이제 막 출발하는 버스 10여 대와 군용 트럭을 향해 울음을 터뜨렸다. 한 여성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통곡했다. 같은 날 러시아 벨고로드주 스타리 오스콜 지역에서는 한 여자 어린이가 동원령에 소집돼 전쟁터로 떠나는 아빠를 향해 “아빠 안녕. 꼭 돌아와”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동원령을 피해 해외로 탈출을 택한 이들도 이별의 슬픔에 잠겼다. 러시아 예비역 상사 올레크(29)는 푸틴 대통령의 동원령이 떨어지자마자 만삭인 아내를 남겨두고 카자흐스탄 국경으로 향했다. 그는 영국 일간 가디언에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날(출산일)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면서도 “푸틴이 나를 전쟁터로 몰아 살인자로 만들게 놔둘 순 없다”고 했다.

이날 러시아 독립언론 모스크바타임스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의 동원령 이후 이날 하루 동안 전국에서 징집된 장병 수는 1만 명에 달했다. 전국적 징집이 시작된 이날 러시아군은 가을까지 여성을 포함한 12만 명을 징집하겠다고 밝혔다. 모스크바타임스는 “동원 대상이 아닌 군 경험이 없는 남성과 학생들까지 당국으로부터 동원 소집 요구서를 받았다”고 전했다.

러, 반전시위 체포 학생도 징집… 탈출 돕는 웹사이트 150만명 몰려

러 전역서 징집 생이별
軍경력 없는 사람-여성도 대상장병 수송 위해 스쿨버스까지 차출
일각 “30만 아닌 100만 이를듯”

시민들 “전쟁 아닌 정치에 동원돼”… 모병소 방화 추정 불길 치솟기도

무차별 징집에 예기치 않은 이별 22일(현지 시간) 러시아 동부 사하공화국 야쿠츠크의 네륭그리 마을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동원된 러시아 남성들이 입영 버스에 탑승하기 전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반전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이나 시위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에게 군 소집에 응할 것을 요구하는 등 무차별적인 징집에 나섰다. 텔레그램 캡처
“정부 관계자들이 체포된 시위대 가운데 남성과 여성을 따로 분리한 뒤 나를 포함한 남성들에게 소집 요구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집에 갈 수 없다고 했어요.”

22일 모스크바에서 반전 시위를 하다 경찰에 붙잡힌 모스크바 대학생 안드레이 샤슈코프(18)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이같이 밝혔다. 러시아 현지 언론들도 당국자들이 반전 시위를 하다 구금된 시위대를 상대로 소집 요구서를 건네며 징집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반전 시위 현장을 취재하다 체포된 현직 기자도 소집 요구서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 “나이·경력 관계없이 무차별 징집”
러시아가 대대적인 징병에 착수하면서 수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주요 도시를 비롯해 시베리아 국경 지역 주민 등 약 1만 명이 하루 사이 전쟁터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WSJ는 이날 연령과 직업에 관계없이 징집 통지서가 발송되고 있다고 전했다. 군 복무 경험이 없거나 대학생일 경우 동원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러시아 정부의 방침과 달리 무차별적으로 징집 요구서가 날아들고 있다는 것. 러시아 변호사 그리고리 바이판은 이날 뉴욕타임스(NYT)에 “군 복무 경험이 없는데도 소집 요구서를 받았다”며 “전쟁이 처음 터졌을 때와 똑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공항에 도착한 한 17세 러시아 남성은 독일 언론 도이체벨레(DW)에 “소집 대상도 아니고 아직 소집 요구서를 받지도 않았지만 혹시나 모를 두려움 때문에 러시아를 빠져나왔다”고 했다. 러시아 내 인권단체 대표인 세르게이 크리벤코는 모스크바타임스에 “통상 하루에 50건 정도 문의가 오는데 동원령 선포 이후 이틀간 동원령 관련 문의전화가 1만4000통 넘게 몰렸다”고 했다.

러시아는 구체적인 동원 기준을 밝히며 진화에 나섰지만 혼란은 커지고 있다. 블라디미르 침랸스키 러시아군 총참모부 국장은 이날 “병사 및 부사관으로 전역한 35세 이하 예비군 등이 동원 대상”이라고 밝혔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거나 1급 장애가 있는 예비군, 16세 이하 자녀를 4명 이상 뒀거나 병사 및 부사관으로 전역한 이들 중 35세가 넘은 예비군도 제외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52세 남성이나 자녀를 5명 둔 남성도 징집 통지서를 받았다는 소식이 이어지면서 ‘총동원 공포’가 확산하고 있다. 러시아 독립 언론 노바야 가제타는 “실제 전쟁에 동원되는 예비군은 러시아 정부가 약속한 30만 명을 훨씬 넘어서는 100만 명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100만 명 징집 주장은 거짓”이라고 했다.
○ “전쟁이 아니라 정치에 동원된 것”
한 남성은 군 모집소 관계자를 향해 “2차 대전 당시 동원령은 진짜 전쟁을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 동원령은 오직 정치를 위한 것”이라고 소리쳤다. 모집소 관계자가 “동원령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하자 이 남성은 “도대체 누구의 미래를 말하는 것이냐”며 맞받았다.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 톨리야티 지역 군인 모집소에는 방화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불이 나기도 했다.

물자도 총동원되고 있다. NYT에 따르면 동부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징집 장병을 수송하기 위해 스쿨버스까지 동원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학교 교사들이 소집 요구서를 돌리는 데 동원돼 집집마다 방문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동원령을 피해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도 ‘생이별’에 슬퍼하고 있다. 이들의 탈출을 돕는 비정부기구(NGO) ‘자유 세계로의 인도(Guide to the free World)’ 대표 노바놉스카야는 영국 일간 가디언에 동원령 이후 하루 동안 150만 명이 단체 웹사이트에 방문했다고 밝혔다. 징집 대상자이거나 막연한 두려움에 러시아를 빠져나오려는 남성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강성휘 특파원 yolo@donga.com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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