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명물 ‘옐로캡’의 비명… 우버-면허價폭락에 빚더미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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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

18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 뉴욕시청 앞 도로에서 시의 명물인 ‘노란 택시’ 기사들이 생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현재 많은 택시 기사들이 차량 공유 서비스 ‘우버’의 공습, 코로나19로 인한 이동 감소, 택시면허권 가격 급락 등으로 빚에 허덕이고 있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18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 뉴욕시청 앞 도로에서 시의 명물인 ‘노란 택시’ 기사들이 생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현재 많은 택시 기사들이 차량 공유 서비스 ‘우버’의 공습, 코로나19로 인한 이동 감소, 택시면허권 가격 급락 등으로 빚에 허덕이고 있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유재동 뉴욕 특파원
유재동 뉴욕 특파원
《“우리는 정의를 원한다.” , “더 이상의 자살을 막아라.” 18일(현지 시간) 낮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의 뉴욕시청 앞 도로. 뉴욕택시근로자연합(NYTWA)에 소속된 수십 명의 택시 기사들이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팻말에는 ‘빚을 줄여라’ ‘파산할 수 없다’ , ‘시와 은행들이 거짓말을 했다’ 등의 문구가 적혔다. 이들은 “업계 불황으로 벼랑 끝에 몰린 우리의 채무를 시 당국이 탕감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약 한 달간 도로 농성을 이어왔다.》





시위대는 우버, 리프트 등 다양한 차량 공유 서비스가 등장한 가운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시민들의 이동 수요 또한 대폭 줄어 택시 기사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시에서 발급하는 택시 면허권 ‘머댈리언(medallion)’을 사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쓰는 바람에 수십만 달러의 빚을 졌다며 현 사태에 당국 또한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했다. 현재 뉴욕에서 면허를 갖고 있는 택시 기사는 약 1만2000명. NYTWA에 따르면 기사 한 명당 부채는 평균 약 60만 달러(약 7억2000만 원)에 이른다.

1987년부터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는 카리브해 아이티 출신의 도로시 르콩트 씨는 “하루 종일 운전을 해도 매출이 300달러(약 36만 원)인데 세금, 기름값, 차량 정비 등에 쓰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우리 택시 기사들은 9·11테러, 허리케인 등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운전을 하며 시민들을 도왔지만 이번 위기는 속수무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6년 전부터 택시 운전을 했다는 중국계 어거스틴 탕 씨 또한 “빚이 수십만 달러에 이른다. 직장도 집도 잃을 위기에 처했다”며 가세했다.

NYTWA의 집행이사를 맡고 있는 바이라비 데사이 씨는 도로 농성만으로는 부족하다며 “20일부터 단식농성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뉴욕의 대표 ‘명물’ 노란 택시(Yellow Cab)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파산-극단적 선택 속출

뉴욕 택시의 사업구조는 한국 개인택시와 유사하다. 기사가 되려면 시가 발급하는 면허권, 즉 머댈리언을 구입해야 한다. 당국은 택시 수를 일정 수준으로 관리하기 위해 1937년부터 이 제도를 운영했다. 머댈리언을 구입한 기사들은 당국이 마련해 놓은 진입장벽 안에서 안정적인 영업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

관광객과 유동인구가 많은 뉴욕에서는 머댈리언의 가치도 한동안 꾸준히 올랐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약 20만 달러(약 2억4000만 원)였던 머댈리언 가격은 2014년 100만 달러(약 12억 원) 이상으로 치솟았다. 택시 기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민자들이 택시 운전을 미국 사회 정착의 지름길로 보고 앞다퉈 은행 빚을 내 면허를 구입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일가친척의 자산까지 몽땅 투자해 면허를 얻으려 했다.

기사들의 바람과 달리 머댈리언 가격 급등은 오래가지 못했다. 현재 가격은 최고 수준이었던 2014년의 10분의 1인 10만 달러 안팎에 불과하다. 일각에서 ‘뉴욕시 택시면허의 거품 붕괴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와 비슷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는 이유다.

우버 등 승차 공유 서비스가 택시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면서 기사들의 수입도 크게 줄었다. 매출이 급감하자 기사들은 머댈리언을 사느라 빌렸던 대출의 원리금 상환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이민자 출신인 60대 택시 기사 에르한 씨는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도저히 빚을 갚을 형편이 못 된다. 현재 빚이 70만 달러에 육박한다”고 토로했다. 그는 “빚을 갚지 못해 은행이 면허권을 압류했다. 이제 뉴욕에서 중산층이 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졌다”고 했다.

많은 기사들이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파산을 신청했다. 특히 2017년 이후 매년 10명 안팎의 기사들이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고 있다. 안타깝게 세상을 뜬 사람들 중에는 한국계 50대 운전사 A 씨도 있다. 약 60만 달러에 면허권을 산 그는 점점 영업에 어려움을 느끼다가 2018년 세상을 등졌다.

시가 책임져야 vs 도덕적 해이

기사들은 사태의 책임이 시 당국에 있다고 주장한다. 애초에 머댈리언을 비싸게 판매해 거품을 키운 것도, 우버를 허용해 택시업계를 고사시킨 것도 당국이었다는 주장이다. 탕 씨는 “시가 (세수) 이득을 취하기 위해 택시면허 가격을 고의로 부풀리고 우버와 리프트의 영업을 허가했다”며 “시가 현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1987년부터 택시 운전을 했다는 한국계 기사 이영 씨(61) 또한 “시는 면허권을 팔아 엄청난 수익을 얻었는데 막상 지금은 택시 기사들이 힘들어하는 것에는 책임을 안 지려 한다. 그래서 화가 난다”고 규탄했다. 경기가 좋았을 때는 시간당 50달러를 벌었지만 지금은 30달러밖에 안 된다고 했다.

시는 택시 기사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재정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맞서고 있다. 특히 당국이 발급한 면허를 사느라 빚에 허덕이는 택시 기사들을 모두 구제하면 기사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또한 “당국이 내 빚을 언제든지 탕감해 줄 것”이라고 믿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다만 시 당국이 그간 어려움에 처한 기사들의 상황을 가만히 보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시는 6500만 달러의 예산을 동원해 기사들의 은행 대출 구조조정을 돕는 방안을 시행 중이다. 1인당 최대 2만 달러의 보조금 등을 지원하는 이 정책으로 지금까지 100명이 넘는 기사들이 일부 빚을 탕감받았다.

그러나 일선 택시 기사들은 이 정도의 지원으로는 생존의 위기를 벗어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시 정부가 아예 기사들의 빚보증을 함으로써 부채 원금을 14만5000달러 이하로 낮추고, 매월 상환액도 800달러 이내로 제한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택시 기사들의 이런 요구에 척 슈머 집권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민주당 하원의원 등 뉴욕을 지역구로 둔 유명 정치인들이 잇따라 지지 의사를 보였다.

기사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쪽은 “시가 애초에 기사들의 머댈리언 투자를 부추겼다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카타리나 피스토어 뉴욕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는 최근 뉴욕타임스(NYT) 기고에서 “시는 머댈리언 가격 급등으로 돈을 벌었고 버블이 커지도록 방치한 책임이 있다”며 택시 기사들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


#옐로캡#택시#우버#면허#빚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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