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치하 워싱턴은 블랙홀”… 英대사 사퇴에 외교관들 부글부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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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대사들, 美행정부 불만 쏟아내… “동맹에 안 알리고 의전무시 다반사
우리도 트럼프 문제점 본국에 보고… 다른 사람이 사임 대상 됐을수도”
英, 외교문서 유출 대대적 조사… 메모받은 언론인 패라지와 친해
일각선 유출 배후로 존슨측 꼽아

사진출처-뉴시스
사진출처-뉴시스
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를 혹평하는 메모가 유출된 지 4일 만에 전격 사임한 킴 대럭 주미 영국대사(65)에 대한 각국 주미 대사들의 동정론 및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불만이 속출하고 있다고 미 언론들이 10일 전했다. 미국이 2017년 이란과의 핵합의 탈퇴, 시리아 철군 등을 동맹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던 데다 관례와 의전도 마구잡이로 무시해 트럼프 치하의 미 워싱턴 근무가 ‘블랙홀(black hole)’처럼 느껴진다는 대사가 적지 않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상당수 주미 대사들은 “우리도 트럼프 행정부의 문제점을 본국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사는 “사임 대상이 우리 중 다른 사람이었을 수 있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WP)도 “빛처럼 빠른 속도로 영국대사가 사임하자 워싱턴 외교관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고 전했다. CNN은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아첨만이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준 셈”이라고 꼬집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국무부 차관보를 지낸 대니얼 프라이드는 WP에 대사 사임을 요구한 트럼프 행정부의 대응을 강력 비난했다. 그는 “사임 압박은 지저분한(nasty) 행동이었다. 미 행정부가 무능하다는 대럭 대사의 평가가 사실로 드러났다”고 일갈했다.

2014년 9월부터 올해 봄까지 주미 프랑스대사를 지낸 제라르 아로 대사(66)도 NYT에 “모든 외교관이 그처럼 한다”며 대럭 대사를 두둔했다. 그는 자신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홀대’도 털어놨다. 2017년 장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교장관의 방미를 추진할 때 렉스 틸러슨 당시 미 국무장관과의 면담 일정을 알려 달라고 두 달 전부터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했다. 미국은 르드리앙 장관의 방미를 하루 앞두고 “20분만 면담이 가능하다”고 통보했다. 결국 프랑스 측은 장관의 방미를 취소했다.

대럭 대사가 보고한 메모를 본 영국 내 관계자만 100명이 넘는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유출 과정에 대한 영국 정부의 대대적 조사도 진행되고 있다. 이 와중에 이번 사태를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둘러싼 ‘정치적 음모’와 연관짓는 관측도 등장했다. 일각에서는 친(親)트럼프 인사이자 열렬한 브렉시트 찬성론자인 보리스 존슨 전 외교장관을 차기 총리로 미는 브렉시트 강경파들이 유명한 EU 잔류파인 대럭 대사 대신 브렉시트 지지자를 주미 대사로 앉히기 위한 공작을 자행했다고 보고 있다. 텔레그래프 등에 따르면 유출된 메모를 처음 전달받은 언론인은 이저벨 오크숏 기자(45)다. 그도 브렉시트 찬성파로 이번 사건을 처음 보도한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에서 2016∼2017년 근무했다. 오크숏 기자는 극우 정치인 나이절 패라지 브렉시트당 대표(55)와도 가깝다. 패라지 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이 2016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했을 때부터 주미 영국대사를 원했던 인물이다.

대럭 대사 사퇴로 존슨 전 장관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면서 사실상 그가 유력했던 총리 선출 과정도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존슨 전 장관은 9일 TV 토론에서 대럭 대사를 적극 옹호하지 않았다. 존슨 전 장관의 보수당 동료인 패트릭 매클로플린 의원은 “총리가 되겠다는 이가 아무 잘못 없이 타국 정부로부터 공격받는 자국 공무원을 보호하지 못하다니 볼썽사납다”고 질타했다. 앨런 덩컨 외교차관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훌륭한 외교관을 버스 아래로 밀었다. 경멸을 받을 만한 행위”라고 비난했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주미 영국 대사 사퇴#미국 행정부#트럼프#외교문서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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