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 고환율에 달라진 여행 풍속도
환율 덜 오른 中, 환전액 대폭 늘어… 필리핀-인니 등 동남아 증가폭 커져
日 출국자 늘었는데도 환전액 감소… 현지서 돈 아끼는 ‘짠돌이 여행’↑
선결제 뒤 떠나는 패키지 여행 관심… 역대 최고 환율에 취소도 적잖아
《고환율에 ‘짠내’ 해외여행
고환율에 여행 풍속도가 달라지고 있다. 중국 등 환율이 덜 오른 나라로 향하는 여행객이 늘고 있다. 국내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도 많지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경비를 최소화해서라도 해외 여행을 포기하지 못하는 관광객이 적지 않다.》
“태국 물가는 저렴할 줄 알았는데 스타벅스를 가보니 아메리카노 한 잔에 120밧(5497원)이네요. 한국은 4700원인데….”
40대 직장인 오대석 씨는 지난해 12월 태국 푸껫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원-달러 환율 상승으로 애초 가고 싶었던 미국 하와이, 괌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나마 비용이 저렴할 것 같은 태국을 대안으로 골랐는데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신혼여행 계획을 처음 세웠던 지난해 6월만 해도 1밧에 41원대였는데, 현재 46원에 육박하면서 6개월 만에 12% 넘게 올랐기 때문이다. 오 씨는 “저렴한 물가를 기대하고 갔는데 환율이 상승하면서 장점이 사라졌다”면서 “호텔 현지 결제 비용부터 비싸졌는데, 커피값마저 한국보다 비싸 여행 기간 내내 환율을 신경 썼다”고 하소연했다.
고(高)환율에 해외여행 풍속도가 달라졌다. 여행지 선택의 주요 기준으로 환율이 떠오르고 있다. 환율이 상대적으로 덜 오른 곳을 선택하거나, 현지 식당에 가는 대신 숙소에서 직접 사서 해 먹는 여행객도 늘고 있다. 가격이 미리 정해져 있어 환율 타격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패키지 여행이 선호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비용 부담에 해외를 포기하고 국내 여행지로 발길을 옮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 환율 덜 오른 나라가 대세
직장인 김태진 씨(39)는 올 초 친구들과 중국 상하이 여행을 계획 중이다.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인 만큼 마음 편하게 놀고 먹고 마시자는 생각에 환율이 여행지 선택의 최우선 기준이 됐다. 지난해 12월 평균 원-위안 환율은 208.26원 수준. 전년 동기(196.93원) 대비 5.8%(11.33원)가량 올랐다. 유로가 같은 기간 14.3% 오른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오른 편이다.
중국을 택한 건 최근 한국인을 대상으로 무비자 관광 입국을 허용한 점도 한몫했다. 김 씨는 “소도시보다 물가가 비싼 편이기는 하지만 비자 발급 수수료를 아낀 돈으로 현지의 맛있는 음식을 사 먹으려 한다”고 말했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서모 씨(40)는 지난해 11월 아내와 함께 마카오 여행을 다녀왔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거리와 비슷한 분위기에 과거 포르투갈이 지배할 당시 지어진 유럽풍 건축물의 느낌도 마음에 들었다. 홍콩을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점은 덤. 무엇보다 마카오 화폐인 파타카는 지난 1년간 원화 대비 가치가 1.6% 오르는 데 그쳤다. 서 씨는 “라스베이거스처럼 호텔 앞 분수 쇼를 즐길 수 있었고, 포르투갈 음식도 합리적인 가격에 사 먹을 수 있어 만족도가 높았다”고 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쓰는 여행 카드인 하나카드 ‘트래블로그’의 국가별(12개국) 환전액·이용액을 분석해 보면 이처럼 환율이 덜 오른 나라를 여행지로 삼는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2025년 1∼11월 기준 전년 동기 대비 환전액 증가 비중이 높아진 나라는 중국(171.9%)이었다. 뒤이어 말레이시아(59.4%), 필리핀(58.3%), 인도네시아(37.8%) 등 동남아시아 국가가 증가 폭이 두드러졌다.
반면 2022년부터 매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일본은 2025년 1∼11월 환전액 비중이 전년 동기보다 오히려 감소(―2.0%)했다. 원-엔 환율은 2025년 연평균 951.39원으로 2024년 연평균(901.59원)에 비해 50원 가까이 올랐다. 동일 인원이 동일한 금액을 환전했다면 환전액이 늘어야 하는데 실상은 거꾸로인 것이다.
지갑이 얇은 젊은 여행객들의 증가로 싸고 맛있게 즐기는 ‘짠돌이’ 여행이 늘어난 결과로 풀이된다. 2만 원에 24시간 카레와 우동 같은 음식을 제공하는 고시원 방 수준의 호텔에 묵으면서 비용을 아끼거나, 야키니쿠나 초밥을 무한리필로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는 식이다.
최근 일본 홋카이도를 방문한 김모 씨(30)는 “술과 고기를 무한으로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을 찾거나 편의점 음식으로 때웠다”면서 “할인점인 돈키호테나 다이소에서 한 푼이라도 더 싼 물건을 구매하려 다른 외국인들과 경쟁적으로 쇼핑을 했다”고 말했다.
일본의 ‘7월 대지진설’ 여파로 일본 관광 수요 둔화에 더해 해외 직구 활성화로 인해 현지 쇼핑 수요 자체가 크게 줄어든 것도 환전액 비중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 여행 떠나기 직전 국내 여행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숙박, 교통, 레저, 투어를 할인받아 결제한 뒤 출국하는 경향성도 한몫했다.
하나카드 관계자는 “환율 등락이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은 중국과 동남아 국가 선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면서 “일본은 자주 방문하는 나라인 만큼 기념품 수요 등이 타 국가 대비 적을 수 있고, 비행 시간이 짧아 체류 기간이 적은 만큼 환전액 둔화 경향이 엿보인다”고 말했다.
● 하와이서 장 보고 끼니 때워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2025년 11월 말 한국의 실질실효환율 지수(REER)는 87.05(2020년=100)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4월 말(85.47) 이후 최저치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1월(86.63)과 비슷하다.
실질실효환율은 세계 60개 교역 상대국과 비교해 어느 정도 구매력을 갖췄는지를 나타내는 환율이다. 당시 원화의 REER 순위는 64개국 중 63위였다. 일본(69.4) 덕에 꼴찌를 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에게 여행은 포기하지 못할 삶의 가치다. 유년기부터 해외여행을 접했거나, 각종 여행 유튜버에게 친숙한 2030세대들에게 환율은 불편할 뿐 넘지 못할 장벽은 아니다.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고 캡슐 호텔에 몸을 구겨 넣을지언정. 대학생 강모 씨는 “2025년 9월 미국으로 떠났을 때 편의점에서 2달러짜리 머핀과 커피세트로 연명했다”고 말했다.
자녀들이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친구들은 다 해외여행 가는데 왜 우리만 안 가느냐”는 자식들 원성을 못 이기는 경우도 많다. 성수기마다 국내 유명 관광지에서 바가지요금을 경험하며 “그 돈이면 차라리 해외를 가겠다”고 결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여행의 목적을 소비보다 경험에 둠으로써 고환율을 견디는 이들도 생겨났다. 바닷가 또는 번화가 인근 호텔을 잡아 조식과 해수욕, 쇼핑을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다소 수고로움을 더하는 식이다. 40대 전문직 송모 씨는 “매년 부모님과 함께 하와이로 2주가량 가족 여행을 떠나고 있는데 올해는 환율 부담으로 와이키키 해변 앞 호텔이 아닌,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진 현지인 집을 에어비앤비(숙박 공유 서비스)로 구했다”면서 “외식도 인근 식당을 찾기보다는 코스트코 회원권을 활용해 구매해서 숙소에서 음식을 해 먹었다”고 말했다.
여행사를 통한 여행 상품 중 배낭보다는 패키지 상품을 선호하고 있는 경향성도 엿보인다. 패키지 상품은 전체 여행 경비의 70∼90%가량을 한국에서 결제하고 가기 때문에 현지에서 고환율 부담이 적다는 게 여행사들 설명이다.
모두투어 관계자는 “10월부터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로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사전 결제를 하는 패키지 여행의 경우 예약 취소율이 증가하고 있지는 않다”면서 “다만 4, 5개월 뒤 상품의 경우 여행 상품 가격 자체가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미국 여행이 부담스러운 여행객은 캐나다로 눈을 돌리고 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 정책 통계 월보 10월호에 따르면 전년 대비 여행객 증가율이 높은 국가는 중국(39.3%), 인도네시아(36.7%), 캐나다(27.3%), 홍콩(13.9%) 순이었다. 북미, 유럽 통틀어 10%대 넘는 증가율을 보인 국가는 캐나다가 유일했다.
● 해외여행 취소하고 국내 관광도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연평균 환율은 1422.2원으로 비상계엄으로 국민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2024년(1364.0원)보다 4.3% 높았다. 심지어 외환위기 직후였던 1998년(1398.9원)을 넘어섰다. 역대 최고치 환율에 국민들도 역대 최고의 경제적,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이런 탓에 일부는 해외여행을 포기하고 국내 여행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는 최모 씨는 “방학을 맞아 아들 어학연수 겸 미국에 있는 가족을 만나러 가려 했는데 달러 강세로 체류비가 걱정돼 포기했다”면서 “그 돈으로 아들은 국내에 있는 영어 캠프를 보내고, 국내 여행을 하는 데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 영등포구에 거주하며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가정주부 윤모 씨(39)는 “겨울 휴가를 동남아 리조트에서 보낼까 생각도 했지만, 높은 환율로 인한 금액적 부담 등을 고려해 국내 호텔, 풀빌라로 계획을 변경했다”면서 “수영장도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 많기도 하거니와 숙박비가 다소 비싸더라도 비행기 삯, 현지 식대 등을 고려하면 해외와 국내 여행 전체 예산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미 예약한 해외여행마저 취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모 씨(58)는 “태국 깐짜나부리 지역으로 봄마다 보름간 골프 여행을 다니고 있어 내년 3월에도 항공권은 끊어놨는데 요즘 밧화 값이 올라 장점이 줄고 있다”며 “취소하고 한국에서 골프를 쳐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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