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외모, 남성적이라 강간 인정 못해” 법원 판결에…여론 ‘와글 와글’

판사들 “피해 여성 외모가 강간 대상 되기에 너무 남성적”이라며 무죄 선고
이탈리아 해안도시 술집에서 페루 여성 술잔에 몰래 약을 타 저지른 강간 범죄
대법원 “무죄 판결 취소하고 다른 도시 법원에서 다시 재판 열어라” 지시

강간 범죄 피해 여성 외모를 비하하며 피고인 무죄를 선고한 이탈리아 앙코나 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해 최근 취소 결정을 내린 이탈리아 로마 대법원 외경. 출처 wikimedia.org

관광여객선 정박지로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 동부 해안도시 앙코나의 고등법원 재판부가 강간 범죄 피해자의 외모를 비하하고 이를 근거로 가해자들에게 어이없는 무죄 판결을 내린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11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최근 이탈리아 대법원은 앙코나 고등법원의 여성 판사 3명이 2017년 내린 페루 출신 여성 강간 사건의 피고인 무죄 판결을 취소하고, 가해 남성 2명에 대한 재판을 중부 내륙도시 페루자의 고등법원에서 다시 열도록 지시했다.

앙코나에 거주하는 가해 남성들은 2015년 페루 출신의 22세 여성을 강제로 성폭행한 혐의로 이듬해 기소됐다. 피해자 측의 신치아 몰리나로 변호사에 따르면 가해자들은 사건 당일 동네 술집에서 만난 피해 여성의 술잔에 몰래 약물을 넣어 혼미한 상태로 만든 뒤 강간했다. 사건 직후 시행한 피해자의 혈액 검사에서 신경안정제용 화합물인 벤조디아제핀이 다량 검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최근 일반에 공개된 앙코나 고등법원 판결문에서 판사들은 “피해 여성의 외모를 살펴볼 때 ‘강간 범죄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남성적(too masculine to be desirable)’이므로 피해자의 증언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시하며 피고인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판사들이 “피해 여성 외모가 강간 대상이 되기에 너무 남성적”이라며 피고인 무죄 선고를 내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고등법원이 위치한 이탈리아 앙코나의 경관. 출처 wikimedia.org

몰리나로 변호사는 “판결문을 읽으면서 정말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 여성의 외모가 못생겼으므로 가해자들이 그녀를 강간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사들의 이야기에 분노가 치밀어서 대법원에 상고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판결문이 공개된 후 앙코나 고등법원 건물 앞에는 여성 200여 명이 모여 “강간 범죄 피해자의 외모를 판결의 척도로 삼은 판사들의 행태를 용납할 수 없다”며 성토 집회를 열었다. 미국 일간 뉴욕포스트는 “페루자에서 다시 열릴 재판에 피해 여성이 참석할지 여부는 알 수 없다”고 전했다. 몰리나로 변호사는 “피해 여성은 가해자들을 경찰에 신고한 뒤 앙코나 지역 사회에서 소외를 당하다가 페루로 돌아갔다”라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