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총기업체 “대량 살상-분쟁지역 국가엔 총 안팔아”

  • 동아일보

헤클러&코흐, 윤리정책 선언… 중동-아프리카 국가 등 대상
전 세계 무기업체 중 첫 조치… 일각 “실효성 없는 생색내기”

“전쟁 지역, 투명성과 민주화 수준이 떨어지는 나라에는 총기를 판매하지 않겠다.”

독일의 거대 총기회사 헤클러&코흐(H&K)가 황당하지만 과감하고, 의미 있는 선언을 했다. 11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G3’와 ‘G36’ 같은 유명 소총들을 생산하는 H&K(1949년 설립)는 지난달 작성한 재무보고서에 전쟁 지역을 비롯해 대량살상 가능성이 높은 국가에는 총기를 판매하지 않겠다는 윤리 정책을 포함시켰다. 전 세계 총기 기업 중 이 같은 방침을 정한 건 H&K가 유일하다.

이에 따라 H&K는 직간접적으로 전쟁이나 분쟁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들에 총기를 판매하지 않을 계획이다. 여기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이집트, 아랍에미리트(UAE) 같은 중동 국가들을 포함해 터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이 포함된다. H&K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회원국을 비롯해 일본, 스위스, 호주, 뉴질랜드 등 ‘검증된 국가’ 중심으로 총기를 판매하기로 했다. 또 이 나라들과 비슷한 수준의 민주화와 사회투명성을 확보한 국가들을 대상으로 총기를 팔 방침이다.

30년 이상 독일에서 무기판매 반대 활동을 펼친 시민운동가 위르겐 그레슬린 씨는 “다른 총기 제작업체들이 ‘그래도 우리가 H&K보다는 도덕적으로 낫다’고 주장할 만큼 H&K는 (총기 제조업계에서도) 악명 높은 회사였다”며 “(H&K의 이번 선언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례적인 조치며,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총기 반대 관련 시민단체 등에서는 H&K가 설립된 뒤부터 지금까지 200만 명 정도가 이 회사가 제작한 총기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도 이 회사의 대표 제품인 G3 소총은 약 1500만 정이 전 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H&K의 이번 선언이 단순한 ‘보여주기’ 조치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단 이 회사의 핵심 판매 지역인 미국에는 정상적으로 계속 제품을 팔 수 있어 실제 재정적 어려움은 거의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 독일 정부와 정치권에서 이미 무기 판매를 제한하는 다양한 정책을 마련 중이다. 새로 마련될 규제에 대비한 일종의 ‘선수 치기’ 성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라르스 카스텔루치 대변인은 “SPD와 독일 경제부는 기업들의 총기 판매, 특히 안전하지 않은 지역으로 총기를 수출하는 것을 규제하는 정책을 대폭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독일#총기업체#윤리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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