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단순 지킴 아닌 개혁의 준비행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17일 03시 00분


■ 日 ‘보수 원류’ 나카소네 前총리 인터뷰
좋은 전통 유지하며 미래 지향… ‘진정한 보수’ 제대로 가르쳐야

“당분간 동아시아 정세는 현상유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시대의 진전, 시간의 경과와 함께 변화는 확실히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유럽의 힘이 떨어져 글로벌 지각변동의 씨앗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일본 사회 ‘보수의 원류’이자 최고 원로로 꼽히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94·사진) 전 총리가 14일 동아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한일 관계 등 각종 현안에 대해 솔직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재임시절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세계 신(新)보수주의를 이끈 일본 정치 리더십의 상징적 인물이다. 일본 언론의 ‘막후 총리’, ‘대통령형 총리’ 등의 수식어는 그의 존재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세계적인 리더십 위기, 북한 및 동아시아의 앞날, 한일 과거사 문제 등 다양한 현안에 대해 그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하게 골라가며 답변했다. 보청기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노령이었지만 예정시간을 훌쩍 넘겨 1시간 반 동안 이어진 인터뷰 내내 꼿꼿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인터뷰는 도쿄(東京) 도라노몬(虎ノ門)에 있는 그의 개인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일본 정치·행정 1번지인 가스미가세키(霞ヶ關)를 지척에 두고 있는 곳이다. 사무실 벽에는 그가 붓으로 직접 그린 ‘지혜의 상징’ 부엉이 그림이 걸려 있었다.

―세계적으로 리더십의 위기라고 한다. 일본도 심각하다.

“일본 정국은 일종의 ‘정체 상태’에 있다. 안정기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태평양과 미중관계, 유럽 정세에도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모두가 주어진 정세에 실려 갈 뿐이다. 스스로 뛰쳐나가 벽을 깨는 리더를 기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결여돼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역시 큰 인물은 국제적 위기, 외교적 위기, 내정 혼란 등의 시기에 나타날 가능성이 큰 것 같다. 한국도 같을 것이다.”
―올해는 선거를 치르는 나라가 많다. 하나같이 집권당에 대한 염증이 심하다. 보수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다.

“보수는 단순히 지켜서는 안 된다. 개혁하기 위해 보수하는 것이다. 즉, 보수는 개혁의 준비행위다. 나는 ‘보수하기 위해 개혁한다. 개혁하기 위해 보수한다’는 말을 신조로 정치해 왔다. 하지만 보수가 뭔지에 대해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제대로 교육하지 않고 있다. 보수가 개혁을 위한 보수인데도 유지하고 사수하기 위한 보수라는 오해가 상당히 있다. 영국 보수당도 좋은 전통을 지키면서 미래를 향해 개혁하는 정당이었다. 일본도 이것을 보고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 대처 과정에서 행정과 관료들의 무책임에 대한 비판도 컸다.

“지진 대책에서뿐 아니라 일본은 정치행정에서 관료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매우 노력해 왔지만 행정 현장과 국민과의 접촉면에서 아직 개선하고 극복해야 할 과제가 매우 많다. 식견과 실력을 갖고 있는 정치가가 관료에 지지 않는 실력을 갖고 국가의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으면 관료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

화제를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정세로 돌렸다.

―북한 지도자가 교체되는 등 동아시아 정세가 격변기를 맞고 있다.

“북한 지도자 교체가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 일본 중국 미국 등 세계 모든 나라가 주목해 왔다. 하지만 극적인 변화는 지금으로서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당분간 동아시아 정세는 현상유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명의 상이함과 생활의 격차는 현상유지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문제의 귀착점은 통일 아닐까.

“통일에 관해 남한과 북한은 늘 (달성해야 할)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통일의 희망은 강하지만 남한과 북한 간 체제의 큰 차이를 뛰어넘을 힘이 아직 생기지 않고 있다. 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적 격차의 해소, 상호교류의 촉진에 따른 민족 협조의 극적인 확대 발전이 필요하지만 화해의 조건을 정비하는 데 아직 시간이 걸리는 정세다.”

―일본과 북한의 국교정상화도 납치문제로 진전되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북한 지도자 교체를 맞아 납치문제와 별도로 국교정상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북한의 지도자 교체에 우리들은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 내부정세와 이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명확히 판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이 어떤 이니셔티브를 쥘지 지켜보고 있는 상태다. 북한과 중국의 관계, 북한과 남한의 협조 관계가 먼저 어떤 식으로 조정될지가 우선이다.”

―중국의 패권주의, 위협론이 부각되고 있다.

“우리에게 중국 위협론이라는 것은 없다. 최근 중국은 미국, 러시아 또는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 협조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고,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고 참는다)라고도 말해 왔다. 이대로 갈지 안 갈지 우리는 주목하고 있다.”

그가 2010년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일중한(日中韓) 협력을 통해 동아시아 발전과 발언권을 강화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담화를 발표했던 것이 생각나 화제를 일본의 아시아관으로 돌렸다.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를 지향한다)로 근대화를 이뤘던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1980년대 미일 무역마찰 속에 생겨난 생존전략에 불과하다는 혹평도 있다.

“현 세계정세와 각국의 움직임은 평화와 협조를 우선시하고 있으며 금세기 들어 중동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일중한 3국간 협력을 확실히 하는 것은 각국 정치가와 국민의 공동책임이다. 소위 일본의 아시아주의라는, 일본이 돌출해 아시아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려는 발상은 일본에 이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일국의 국가적 이익이 돌출해 타국을 희생하는 형태로는 평화와 안정과 국민의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 국경을 넘은 국민적 협력, 경제와 문화교류 촉진에 의해서만 국민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

―독도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한일 전후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과거 역사문제는 피해를 받은 국민의 기억에서 그리 간단히 지워지는 법이 아니다. 50년, 100년에 걸쳐서도 국가 간, 국민 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과거에 대해 늘 반성하고, 시간의 경과에 관계없이 겸허하고 성실하게 대응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 (이런 자세를) 자자손손 전해야 한다.”

그의 이 같은 발언은 놀라운 것은 아니다. 그는 1985년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총리 자격으로 처음 공식 참배했다가 주변국의 격렬한 반발을 사자 이듬해부터 중지했고 2005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에게 참배를 그만두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보수이지만 한중일 협력이 국익에 더욱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현실파’이기도 한 것이다.

일본 사회의 최고 원로로 꼽히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그의 뒤에는 붓으로 직접 그린 부엉이 그림이 걸려 있다. ‘지혜의 상징’이라는 부엉이를 그리는 건 평소 그의 취미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일본 사회의 최고 원로로 꼽히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그의 뒤에는 붓으로 직접 그린 부엉이 그림이 걸려 있다. ‘지혜의 상징’이라는 부엉이를 그리는 건 평소 그의 취미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최근 일본의 한류(韓流) 붐에 대한 평가는….

“한류라는 것이 일본 사회에 생겨, 국민에게 인식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한국문화에 대한 일본의 경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국문화의 일본문화에 대한 영향에 대해 학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충분히 인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서로 고유문화를 존중하는 것이 평화와 번영의 기초다.”

■ 나카소네 前총리는

총리 재임기간(1982년 11월∼1987년 1월)에 이른바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내세우며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끌어올린 일본 정계의 최고 원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유대를 다지며 미일 동맹이라는 일본 외교의 기본방향을 설계했고 1983년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해 한일 협력의 길을 텄다.

역대 내각이 금기시해오던 ‘방위비의 국민총생산(GNP) 1% 한도’를 폐지하는 등 일본 사회의 보수·우경화를 주도했다는 비판도 있다.

도쿄대를 나와 내무성 관료로 일하다 1947년 정계에 입문해 내리 20회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과학기술처 장관, 운수 장관, 방위청 장관, 통산 장관, 행정관리청 장관 및 집권 자민당 간사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3년 정계에서 은퇴해 현재 세계평화연구소 회장을 맡고 있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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