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돈” 가치관 바뀌고… “취직할 때까지” 캥거루족 늘고…

  • 입력 2009년 9월 4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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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1년/세계 중산층 리포트]<4>비극의 경제위기 세대

동아일보의 ‘글로벌 경제위기 1주년 특별취재팀’ 기자 10명이 지난 한 달간 13개국에서 만난 20대 젊은이들은 경제위기 한파를 온몸으로 느끼며 좌절하고 있었다. 이들을 절망에 빠뜨린 주범(主犯)은 1년 만에 급등한 청년 실업률. 3일 유럽연합(EU) 통계기관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7월 현재 EU 27개국의 25세 이하 청년층 실업률은 19.8%로 1년 전보다 4.4%포인트나 올랐다.

‘험난한 취업길’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은 대학 졸업 후 일자리를 얻고, 결혼해서 아이를 갖고, 내 집을 장만하는 평범한 삶이 아득한 꿈이 되어버렸다.

청년 실업이 심각해지면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는 ‘캥거루족’이 늘고 있다. 일본, 영국, 스페인 같은 선진국은 물론 중국, 인도 등 신흥국 젊은이들도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졌다.

사는 게 힘들어지다 보니 낭만을 우선시하던 젊은이들의 가치관은 ‘사랑보다 돈’으로 바뀌었다. 사귀던 애인이 직장을 잃자 “힘든 시기에 혼자 벌어서 살 수 없다”며 야멸치게 결별을 통보하기도 한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 언제든 잘릴 수 있음을 알게 된 이들은 ‘안정적인 직장’에 몰리고 있다. 인도에서는 공무원 수백 명을 뽑는 데 무려 40만 명이 지원했다.

무엇보다 부모 세대가 슬퍼하는 건 ‘좌절된 꿈’으로 번민하는 청춘들이 늘어났다는 것. 외국 유학의 꿈을 포기하고 어디든 자신을 받아주는 곳에 취직하기로 결정한 엘리트 젊은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말한다. “좌절하고 우울해하고 있기엔 우리는 젊고 남은 인생은 길다. 희망을 포기하진 않겠다”고.

특별취재팀

b>“어렵게 들어간 회사, 해고계획에 뒤숭숭”
헝가리: 너지 레일라(23·부다페스트경제대 4학년)

▽2009년 4월 ×일

타타 컨설팅에 합격했다! 9개월간 원서를 낸 회사만 90곳. 4군데 회사에서 동시에 떨어졌을 땐 내가 이렇게도 능력이 없는 사람인가 싶어 너무나 슬펐지만 이젠 아니다. 지방에 계신 엄마도 매우 좋아하신다. “레일라, 이제 월세는 네가 낼 수 있게 됐구나” 하시면서. 부다페스트는 서빙 같은 파트타임도 구하기 어려워 매달 용돈을 받을 때마다 얼마나 죄송했는지 모른다.

엄마도 고생이 많으시지. 아빠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수입이 많이 줄었으니까. 그래도 엄마가 교장선생님이어서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2009년 8월 12일

출근할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그런데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연말에 120명이 해고될 예정이란다. 독일 고객이 의뢰했던 프로젝트를 값이 더 싼 인도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새 직장을 구하느라 정신이 없다. 해고되기 전에 미리 나간 사람들 덕에 내가 취직하게 됐으니 기분이 묘하다.

어쩌다 헝가리가 이렇게 됐을까. 작년 10월 말 국제통화기금(IMF) 등으로부터 200억 달러가 훨씬 넘는 돈을 빌린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까짓 경제위기가 내 꿈을 꺾지는 못한다. 열심히 일하면 매니저까지는 오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b>“대학 졸업후 부모님께 손 벌릴 줄은…”
스페인: 올린타 로페스(28·바르셀로나 국제관계학원 석사과정)

“대학 졸업 후에도 여전히 부모님에게 도움을 받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어요.”

바르셀로나 국제관계학원(IBEI)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올린타 로페스 씨는 국제기구에 들어가 아프리카의 빈민촌 아이들을 도우면서 자기만의 집을 마련하겠다는 꿈을 잠시 접었다.

그는 지난해 10월 8900유로(약 1584만 원)의 대학원 학비를 대출받을 때도 부모 신세를 졌다. 경제위기 후 대출 조건을 강화한 은행들은 부모의 보증 없이는 한 푼도 빌려줄 수 없다고 했다.

그의 부모는 치과 의자 제조업체와 보석 가공 공장에서 일한다. 어머니가 일하는 공장은 올해 들어 직원의 절반을 내보냈다. 사이가 좋던 부모는 요즘 돈 때문에 간간이 언성을 높이며 싸움을 한다. 그는 주중에는 카페 서빙과 초등학생을 상대로 한 컴퓨터 과외, 주말엔 요트 강사 등 세 가지 아르바이트를 뛰고 있다. 매달 300유로씩 내야 하는 학자금 대출 원리금과 교통비, 식비는 자기가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청년실업률은 38.4%로 27개 유럽연합(EU)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스페인에는 부모와 함께 사는 ‘캥거루족’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부모 세대는 우리 보고 ‘불행한 세대’라고 하는데 아직 꿈을 포기하기엔 젊잖아요. 아쉬운 대로 인턴 자리라도 구해 용돈을 벌면서 국제기구 취업에 도전할 거예요.”

b>“직장 없다는 이유로 남친이 이별 통보”
중국: 쑤창(蘇暢·24·회사원)

“사귀던 사람이 제게 이별을 통보하더군요. 제가 직장이 없다는 이유로요.” 그는 인터뷰 도중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사는 쑤창 씨는 글로벌 경제위기가 막 터진 시점에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경험을 했다. 연인과 헤어지게 된 이유는 당시 쑤 씨가 무직 상태였기 때문. 그는 2007년 9월 파트타임으로 다니던 웨딩드레스 숍을 그만두고 계속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쑤 씨가 직장을 그만둘 때 남자친구는 그의 선택을 반기지 않았다. 남자친구는 지난해 초 “경제가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다. 2008년 4, 5월 정도까지는 일을 다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둘 사이에 이 문제를 놓고 마찰이 잦아졌다.

결국 작년 9월쯤 남자친구는 쑤 씨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나 혼자 두 명을 먹여 살릴 순 없어.”

그 후 쑤 씨는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혼 상대는 남자친구와 같은 회사에 다니던, 높은 직책의 돈을 많이 버는 여자였다. 쑤 씨는 “경제위기가 터진 뒤 젊은 남자들이 결혼 상대를 고를 때 예전보다 여자의 직장과 경제수준을 많이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쑤 씨는 올 2월 한 게임회사에 정식직원으로 채용됐다. 요즘 그는 회사 업무가 바빠지고, 월급도 줄면서 사람을 만나거나 서로 연락하는 일이 드물어졌다고 한다.

b>“연봉 적지만… 안정된 교사가 좋아요”
영국: 데이브 리드(27·대학원생)

올해 9월은 정말 특별한 달이다. 교사가 되기 위한 대학원 과정(PGCE)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1월에 건물환경 점검업체인 ‘뷰로 베리타스’를 퇴직했다. 큰 건물의 상하수도와 환경, 위생관리, 위험도를 측정하는 일이었다.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다. 하지만 회사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타격을 받은 뒤 나를 포함한 팀원 모두에게 재택근무를 지시했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 대신 어렸을 때부터 바랐던 과학교사의 꿈을 다시 찾기로 했다. 영국에서 과학교사를 하려면 대학 학위에 더해 PGCE 과정을 마쳐야 한다. PGCE는 내년 7월까지 10개월 동안 진행된다. 연 3000파운드(약 600만 원)의 수업료와 생활비는 정부에서 저리로 대출해준다.

교사가 되면 초봉은 2만2000∼2만4000파운드(약 4400만∼4800만 원)에서 시작한다. 전 직장 연봉이 2만 파운드 정도였으니 좋은 편이다. 하지만 교사는 연봉이 일반 회사에 비해 적게 오르는 것이 단점이다. 물론 직업의 안정성은 교사가 최고다. 나도 언젠가는 모기지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재산 증식을 해야 하는데 과연 언제쯤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게 9월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가 있다. 여자친구 나타샤와 5일 마침내 결혼한다. 멋진 턱시도도 준비했다. 나타샤에게 “사랑한다고, 그리고 앞으로 멋진 남편, 아빠, 훌륭한 교사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도 구직난… 유학 꿈 접었죠”
인도: 가리마 다완(23·대학원생)

쇼핑센터가 많아 항상 젊은이들로 붐비는 인도 뉴델리 디펜스콜로니 지역. 이곳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대학원생 가리마 다완 씨(23·여)는 인도 델리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는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경제위기가 삶에 미친 영향을 말해 달라”고 하자 빠른 인도식 영어로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얼마 전 한 친척한테 전화가 왔어요. 미국에서 MBA 공부를 했는데 아직 거기서 일자리를 못 찾고 있는 사람이죠. 그분이 저한테 ‘여기 일자리가 너무 없다. 그러니 너도 굳이 여기까지 와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실망이 컸어요. 미국 유학은 오래전부터 제 꿈이었거든요.”

다완 씨가 꿈을 접은 데는 1년에 수천만 원씩 되는 유학비용 문제도 있다. 요즘 그가 부모에게 받는 용돈 액수는 반 토막 났다. 다완 씨는 “아버지는 이미 은퇴했고 어머니 혼자 직장에 나간다”며 “이젠 돈을 쓰기 전에 ‘과연 나한테 필요한 물건일까’ 하고 두 번 이상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인도에서 직장을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다완 씨의 한 친구도 얼마 전 한 외국계 회사에서 해고됐다. 다완 씨는 “다국적 회사들은 경기 침체가 오면 우리 같은 현지인부터 솎아낸다”며 안타까워했다.

“빨리 직장을 잡아 가계에 보탬이 돼야 하는데 참 어렵네요. 그냥 좀 더 공부하고 나중에 어디든 받아주는 곳에 취직해야죠. 미국에서 공부하고 직장을 잡길 바랐건만…. 모든 게 헛된 꿈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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