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노다지 벌써 바닥 보이나” 지구촌 불안

  • 입력 2008년 5월 24일 03시 01분


중동 석유개발 올해로 100년

1908년 5월 26일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의 한 외진 산악지역.

영국의 지질학자 조지 레이놀즈는 하늘로 솟구치는 시커먼 액체를 황홀한 눈으로 쳐다봤다. 중동에서 석유를 찾아내기 위해 공들인 지 6년 8개월째. “헛수고를 중단하고 철수하라”는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땅을 파 들어간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중동에서 석유 시추에 성공한 지 100년. 중동의 싸고 풍부한 석유는 한 세기 동안 전 세계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돼 왔다. 하지만 최근 유가가 폭등하는 가운데 예상보다 빨리 석유가 고갈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잇따르면서 지구촌의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질 ‘포스트 오일 시대’를 준비하는 움직임도 빨라졌다.

○ 석유 없는 세상…머지않은 미래

‘각종 플라스틱 제품과 합성섬유로 만든 옷, 신발이 없어진다. 화학비료나 살충제, 의약품, 필름, 잉크, 비닐봉지, 아스팔트도 자취를 감춘다. 트럭 같은 운송수단이 멈추면서 슈퍼마켓에서 신선한 우유와 채소를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석유 없는 세상(worldwithoutoil.org)’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미래의 모습이다. 석유가 사라진 가상현실에서 사는 방식을 소개하는 이 사이트에는 전 세계 누리꾼 1800여 명이 올린 난감한 상황들이 담겨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예상보다 빨리 다가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22일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앞으로 20년 안에 전 세계 석유 공급이 수요보다 매일 1억 배럴씩 모자랄 것으로 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석유 부족 현상은 이르면 2012년부터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석유 생산이 최고점에 이른다는 이른바 ‘피크 오일(peak oil)’ 시기는 추정 근거와 방식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영국의 석유고갈분석센터(ODAC)나 미국의 에너지부(DOE) 등 전문 기관의 전망은 대략 2030∼2050년으로 비슷하다.



○ ‘포스트 오일 시대’의 대안 찾기

일각에서는 일단 낙후된 중동 유전의 설비를 교체하면 예상보다 더 오래 충분한 양의 석유를 뽑아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남아 있다.

영국의 싱크탱크 채텀하우스가 발행하는 ‘월드투데이’ 5월호는 “중동 국가들이 서방과 석유 개발에 협력한다면 석유의 고갈을 훨씬 더 늦출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들 국가는 서방 자본의 진출을 정치적 개입이나 경제적 착취로 받아들여 해결이 쉽지 않다.

세계 각국은 조력, 수력, 풍력, 태양열 등을 활용한 각종 대체에너지 생산에 적극 나섰다. 바이오원료 사용량도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유럽재생에너지위원회(EREC)의 지난해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대체에너지 시장 규모는 2006년 380억 달러로 전년보다 26% 증가했다.

유럽연합(EU)은 2020년까지 전체 연료의 20%를 석유가 아닌 다른 에너지로 대체하겠다는 계획 아래 관련 프로그램 350여 개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도 2020년까지 360억 갤런의 에탄올을 생산하는 한편 기업에 세제 혜택 등을 주며 대체에너지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으면 전 세계 도로에는 수소나 옥수수 원료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다니고 가정집마다 태양열을 이용하는 작은 냉장고 크기의 자체 발전소가 들어서게 된다. 다만 이런 대체에너지 개발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각국의 엄청난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 중동 산유국 딜레마

걸프 6개국 작년 석유수출로 400조원 수익… 다른 ‘황금알’ 없어 고민

석유는 모래밖에 없던 중동의 불모지를 황금의 땅으로 바꿔 놓았다. 특히 최근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중동 경제는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고,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커지고 있다.

미국 국제금융연구소(IIF)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오만 등 걸프협력회의(GCC) 소속 6개국이 석유를 수출해 벌어들인 수익은 지난해 3810억 달러(약 400조 원), 천연가스 수출액은 260억 달러에 달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발표한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에서 고유가 덕분에 올해 중동 지역 전체의 경제성장률이 지난해의 5.8%를 넘어 6.1%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엄청난 ‘오일 머니’ 덕분에 중동의 자본력은 서방을 위협할 정도가 됐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세계 최대 국부펀드인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투자청의 자산 규모는 지난해 말 현재 8750억 달러에 이르고, 쿠웨이트도 2000억 달러 규모의 국부펀드를 운용하고 있다.

아부다비투자청이 지난해 씨티그룹에 75억 달러를 투자해 최대주주가 되는 등 중동의 자본력이 각국 기업과 금융계, 부동산 업계를 뒤흔들면서 서방 국가들이 경계의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석유 없는 중동 경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나치게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월드팩트북에 따르면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는 세수(稅收)의 75%를, 이란은 세수의 85%를 석유 수출에서 거둬들이고 있다. 중동 산유국 중 비교적 산업이 다양한 것으로 평가되는 아랍에미리트도 석유 판매 수입이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차지한다.

그런 만큼 중동에서 제조업 등 다른 산업의 발전은 느리게 진행되고 있어 머지않아 ‘포스트 오일 시대’를 맞게 될 중동의 미래는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

■ 석유개발의 분쟁사

서구국가, 석유 통해 중동 가치에 눈떠

이란 쿠데타-이라크 전쟁 등 잇단 개입

중동 석유의 개발 100년을 맞이했지만 인류가 석유를 활용한 것은 더 오래 전이다.

페르시아전쟁사를 다룬 ‘역사’의 저자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4000년 전 바빌론 탑 공사에 아스팔트가 사용됐다.

그러나 이는 지표면에 분출된 석유의 일부를 이용한 것이었고 그나마도 석유의 화학적 물리적 성질을 제대로 활용한 것은 아니었다.

근대적 석유시추산업이 시작된 것은 185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에드윈 드레이크가 기계굴착법으로 21m 지하에서 석유 30배럴을 채굴하면서부터. 미국 석유산업의 본격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등화용이던 석유는 난방용으로 활용됐고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디젤기관 및 선박용 연료로 중유가 사용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동력원의 자리를 차지했다.

석유가 생활 여건의 개선은 물론 국력과 직결되면서 석유는 분쟁의 씨앗이 됐다.

BBC 홈페이지는 피로 얼룩진 석유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본격 참전으로 이어진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침공을 그 사례로 들었다.

미국이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응해 석유 수출을 제한하자 미국산 석유 수입에 의존해 해군력을 유지하던 일본은 미국과의 정면 승부에 나섰다는 것이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 이후 인도네시아의 유전으로 눈을 돌렸다.

서구 사회는 석유를 통해 중동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53년 발생한 이란 쿠데타의 배후세력은 이란의 석유산업 국유화를 반대한 미국과 영국이었다.

미국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개입한 1991년의 걸프전은 석유 공급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석유는 2002년 이라크전쟁 발발의 주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딕 체니 미국 부통령은 2002년 8월 “사담 후세인이 전체 중동지역의 맹주가 되고 세계 석유 공급을 좌지우지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라크의 석유는 후세인이 군사력을 키우는 주요 자금줄이기도 했다.

중국이 석유 확보를 목적으로 수단 정부를 지원해 국제적 비난을 산 것도 ‘석유 벨트’를 구성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치열한 외교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BBC는 석유가 고갈된 이후 세계가 원자력발전에 주목한다면 미래에는 우라늄 자원 보유국들이 현재의 산유국처럼 전략적으로 재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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