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2期]‘폭정국가 체질개선’ 압박외교 시사

  • 입력 2005년 1월 21일 17시 45분


《“민주주의를 전파해 미국의 안보를 지키겠다”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20일 취임사는 테러와의 전쟁 시대를 관통하는 외교 패러다임을 알린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유의 소중함을 지키는 것이 미국의 건국정신이자 미국의 안보를 위한 시대의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신(新)개념 안보=이 구상은 2002년 9월 발표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에서 처음 선보였다.

부시 행정부의 논리는 분명했다. 중동의 암담한 정치현실 때문에 미래를 잃어버린 젊은이들이 과격 성직자들의 ‘반미 유혹’에 빠져 테러조직의 인력 자원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는 민주화 및 경제개발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주도한 이 외교원칙은 ‘민주국가끼리는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국가 간 분쟁개념을 뛰어넘어 테러집단 대 국가 간 갈등의 원천을 차단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부시 대통령의 20일 취임사는 이런 안보전략을 집권 2기의 세계경영 기조이자 철학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이중 잣대 논란=‘민주주의 전파론’은 인권과 핵개발 문제가 맞물려 있는 북한과 이란에 우선적으로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특정 국가를 거론하지 않았지만, 라이스 국무장관 내정자는 18일 두 나라를 포함한 6개국을 ‘폭정의 거점(outposts of tyranny)’으로 규정하며 압박외교를 예고한 바 있다.

그러나 두 나라는 미국의 이중 잣대를 비난하며 반발할 게 분명하다. 북한 핵 협상을 위한 6자회담에도 불똥이 튈 수 있다. 무엇보다 미국의 이중 잣대를 둘러싼 해묵은 논란이 재연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토머스 케로더스 카네기재단 부이사장과 폴라 도브리안스키 국무부 차관은 2003년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서 지상논쟁을 벌였다.

케로더스 부이사장은 “파키스탄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집권 연장을 위해 헌법을 뜯어고쳤지만 미국은 테러범 색출에 필요하다며 그를 칙사 대접한다”고 비난했다.

도브리안스키 차관은 “미국은 우방국일지라도 인권침해 사례에는 우려를 표시했다”며 반론을 폈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이런 비난을 우려한 듯 “자유 없는 인권은 없다”며 안보전략과 인권정책은 하나임을 강조했다. 다만 “미국식 (민주주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고, 해당국 국민이 제도를 선택하도록 돕겠다”는 단서를 붙였다.

▽올해 취임사의 특징=부시 대통령은 취임사의 70%를 민주주의 전파라는 주제에 집중했다. 반면 사회보장제도 개혁 등 민생과 직결된 국내 현안은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는 파격을 시도했다.

9·11테러, 이라크, 북한 등 그가 각종 연설에서 단골로 사용하던 어휘도 빠졌다.

‘천지만물의 창조자의 형상’이라는 성경구절 및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아우르는 ‘이집트 시나이 산의 진리(truths of Sinai)’ 같은 종교적 표현도 동원했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美 ‘민주주의 전파’ 과거엔…▼

19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내정자에 대한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민주당 바버라 박서 의원은 1984년 ‘럼즈펠드-후세인 면담 사건’을 문제 삼았다.

당시 제약회사 최고경영자였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이라크를 방문해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2시간 동안 만났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후세인 대통령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란 견제라는 당장의 안보목표를 위해 이라크와 손을 잡았다.

신보수주의자(네오콘) 그룹의 이론가인 빌 크리스톨 위클리 스탠더드 편집장이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1980년대 공화당 정부는 이상주의적 정치와는 거리가 있었다”고 말한 것은 이때 일을 의식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20일 취임식에서 선언한 ‘민주주의 수출’ 구상은 1세기 전 국제연맹 창설을 제안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이상주의 외교를 연상시킨다.

윌슨 대통령은 1913년 이웃나라 멕시코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미국 기업의 손실이 있더라도 쿠데타 세력과는 무역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1918년 의회에서 “미국의 전쟁은 도덕 회복과 인류 해방을 위한 것”이라고 연설했다.

그러나 이런 이상주의적 전통은 냉전시대 옛 소련과의 체제 경쟁을 거치면서 변질됐다.

미국은 반공 세력이라는 확신만 있으면 독재국가를 지원했고, 반정부 무장세력을 도왔다. 왕족 일가가 국가 재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미국은 석유자원의 안정적 확보, 이슬람 종주국에 친미 정부를 유지한다는 이유로 눈을 감았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美언론 “고상한 원칙, 어려운 실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일 취임식에서 약 20분간 연설하면서 ‘자유(free 또는 freedom)’를 무려 34차례 언급했다. ‘liberty’(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를 의미)라는 단어도 15번 사용했다.

미 언론은 대부분 구체성이 빠진 연설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부시 대통령은 ‘자유’를 강조했지만 언론은 오히려 부시 대통령이 언급하지 않은 단어들에 주목했다.

인권단체인 휴먼라이트워치의 케네스 로스 사무국장은 “부시 대통령이 ‘자유’를 강조하면서 ‘인권(human rights)’을 피해 간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했다. ‘인권’이라는 단어는 부시 대통령의 연설에서 “자유가 없으면 인권도 없다”는 대목에서 딱 한 차례 나왔을 뿐이다.

로스 사무국장은 “자유는 추상적 개념이지만 인권은 부시 행정부를 포함한 모두를 구속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비인간적 행위 또는 고문을 포함한 강압적인 행위가 벌어졌을 때 모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변할 수는 있지만 인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곤란한 부분은 피해 갔다는 것.

뉴욕타임스는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9·11테러 등의 단어를 언급하지 않고 건국이념인 자유를 강조하면서 집권 2기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유를 확산시킬 수 있는지 분명한 지침을 내리지 못했고, 그의 이상(理想)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카고트리뷴은 ‘고상한 연설, 어려운 문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부시 대통령의 취임 연설은 말하기는 쉽지만 해내기 어려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부시 대통령의 고상한 원칙들이 긍정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어려운 과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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