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쿠다웰라 르포]지진해일로 큰 딸 잃었는데…

  • 입력 2005년 1월 10일 18시 17분


코멘트
“아빠는 언제 오실지…”지진해일에 큰딸을 잃은 산티 씨가 9일 돌이 지난 막내딸을 안고 아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쿠다웰라=황진영 기자
“아빠는 언제 오실지…”
지진해일에 큰딸을 잃은 산티 씨가 9일 돌이 지난 막내딸을 안고 아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쿠다웰라=황진영 기자
10일 오후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남쪽으로 190km 떨어진 해안 도시 쿠다웰라의 해안 마을.

지진해일로 큰딸 사미카 양(11)을 잃은 산티 씨(28)가 지붕이 내려앉은 집에서 ‘오지 못하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산티 씨의 남편 자얀다 씨(32)는 한국에 불법 체류 중이다. 고깃배를 타던 남편은 지난해 5월 돈을 벌기 위해 관광비자로 한국에 갔다. 그리곤 타일 회사에 취직했다고 했다. 첫 달 월급으로 85만 원을 받아서 700달러(약 63만 원)를 보내왔다. 스리랑카에서 배를 탈 때엔 6개월은 벌어야 하는 돈이다.

하지만 돈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1개월짜리 관광비자가 만료돼 불법 체류자가 됐고, 일자리도 잃었다. 그나마 한국말을 못해 6개월 이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산티 씨는 지진해일이 지나간 후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큰딸의 죽음을 알리자 남편은 소리 내 울기만 했다.

사미카 양은 장래 희망이 교사였다. 집에 돌아오면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동생들에게 가르치며 ‘학교 놀이’를 자주 했다고 한다.

지진해일이 덮치던 날, 막내딸 랏미 양(1)이 감기 증세를 보여 산티 씨는 둘째 아샌 군(4)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 혼자 남은 사미카 양은 가게에 반찬을 사러 갔다가 지진해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그리곤 마을 공동묘지에 다른 희생자 70명과 함께 묻혔다.

큰딸이 죽었지만 남편은 오지 못했다. 불법 체류자여서 한 번 출국하면 다시 한국에 입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티 씨는 “남편이 있으면 힘이 되겠지만 올 수 없는 상황”이라며 “남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역시 한국에 있는 사미카 양의 삼촌 르완 씨(25)가 대신 지난해 12월 30일 귀국했다. 2003년 6월 한국에 간 르완 씨는 경남 거제시 삼성중공업에서 시간당 3200원을 받고 일한다.

르완 씨는 “형님은 6개월이 넘도록 한 푼도 벌지 못해 비행기표를 살 수 없어서 오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지진해일 피해국가 출신의 불법 체류자에 한해 출국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특별 조치를 취했지만 르완 씨는 그런 소식도 알지 못했다.

집이 무너져 1km 떨어진 남동생 집으로 거처를 옮긴 산티 씨는 큰딸을 잊을 수 없어 아침이면 집에 갔다가 저녁이면 동생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산티 씨는 10일 오후 큰딸이 신었던 흰색 운동화 한 짝을 찾아서 동생 집으로 돌아왔다.

쿠다웰라(스리랑카)=황진영기자budd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