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이라크발 테러에 '휘청'

  • 입력 2004년 4월 9일 17시 37분


"테러리스트의 위협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이라크에서 자위대를 철수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일본인 3명이 이라크 무장집단에 피납된 것과 관련해 9일 정면돌파 방침을 거듭 밝혔다. 집권 자민당의 대다수 의원들도 "자위대 파병은 이라크 평화와 부흥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며 철수 불가론에 가세했다.

아직은 '테러에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명분론이 '무고한 인명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현실론을 압도하는 양상.

하지만 인질로 잡힌 3명이 희생되는 사태로 번질 경우 고이즈미 총리는 정권을 내놓아야 할 위기에 몰릴 가능성이 높다고 일본 언론은 분석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고이즈미 정권이 2001년 4월 출범 이후 최대의 시련을 맞았다"고 보도했다.

▽충격받은 일본 열도 = 무장집단이 인질의 눈을 가린채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장면이 TV로 방영되자 일본 열도는 충격에 휩싸였다. 이 와중에 이라크 남부 사마와의 자위대 기지 근처에 이틀 연속 포탄이 떨어졌다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파병에 대한 찬반 논쟁이 다시 제기되는 등 온통 어수선한 분위기다.

일본 언론은 이번 사건이 자위대 파병후 처음으로 일본인을 겨냥한 테러 협박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일본 정부는 파병후 방어능력이 없는 민간인을 인질로 삼는 범죄를 가장 걱정했는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하루전 자위대 주둔지 부근에 포탄이 떨어졌을 때만 해도 "자위대를 철수시키려는 위협의 하나로 본다"며 여유있는 표정이었으나 8일 밤 피납 사실을 전해듣고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굳게 다물고 관저로 들어갔다.

피납자가 소속된 비정부기구(NGO)측은 "이번 사태는 미국 영국을 좇아 자위대를 이라크에 보낸 일본 정부의 책임"이라며 조기 철수를 요구했다.

자위대 파병을 반대한 야당도 정부의 책임을 단단히 추궁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의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국회대책위원장은 "자위대 파견을 포함해 고이즈미 총리의 책임을 따져봐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일본 정부 = 도쿄의 외교 소식통은 "고이즈미 총리는 정치생명을 걸고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병한 만큼 중간에 발을 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일본 정부는 자위대를 철수시킬 경우 이라크에 군대를 보낸 국가들에 영향을 미쳐 최대 동맹국인 미국을 더욱 곤경에 빠뜨릴 것을 우려하고 있다. 민간인 납치로 요구가 관철되는 선례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논리도 일본 정부의 원칙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일본 정부의 고민은 미국과의 공조를 다짐하고 있지만 사건 해결을 위해 독자적으로 손을 쓸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 인질구출 대책반의 실무자들은 "무장집단이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어서 저쪽에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려야할 처지"라고 말했다.

▽고이즈미, 또한번 도박할까 = 현재 일본내 여론은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쪽보다는 무장집단의 행위를 비판하면서 테러에 물러서서는 안된다는 쪽으로 쏠려 있다. 하지만 이라크에서 돌발사태가 계속되면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여당이 참패해 정권이 바뀌는 사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상황이 악화될 경우 일본 정부가 자위대 안전에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자위대 병력을 증파하거나 무장 강도를 더 높일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는다. '애국심'에 호소해 철수여론을 잠재우는 한편 대미동맹 기조의 강화로 활로를 찾으려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야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자위대를 이라크에 보낸 이유가 미국의 파병요청 외에 자위대의 활동영역을 넓히려는 의도도 있다는 점에서 이런 분석은 설득력을 갖는다.

미국의 이라크공격 이후 일관되게 미국을 지지해온 고이즈미 정권의 '미국추종 외교'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