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4년 3월 19일 16시 16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외신들은 18일 파키스탄 북서부 국경지역에서 파키스탄군에 포위된 것으로 알려진 아이만 알 자와히리를 이렇게 소개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이날 CNN 통신에 '중요 인물'이 포위망에 걸려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알 자와히리는 1951년 이집트에서 손꼽히는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아랍권의 이슬람학 중심지인 알 아자르 대학(카이로 소재)의 대학자였고 부친은 카이로 대학의 약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10대 때 이슬람 근본주의 물결에 휩쓸렸다. 15세에 아랍권 최고(最古)의 근본주의 단체인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부친이 재직한 카이로대 의대를 74년 졸업했고 4년 뒤 외과의사 면허를 따 정상궤도로 돌아온 듯했다.
그러나 이집트를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로 바꾸려는 마음속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79년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현지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의지는 더 굳어졌다. 81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암살사건에 연루돼 불법 무기소지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소 뒤 그는 아프간에서 이슬람 지하드 단체를 조직, 본격 테러에 나섰다. 96년 파키스탄 주재 이집트 대사관 폭탄테러와 97년 이집트 관광객 58명 학살 배후로 거론됐다. 98년 오사마 빈 라덴을 만나 자신의 테러조직을 알 카에다와 합쳤다.
98년에는 케냐 및 탄자니아의 미 대사관 폭탄테러를 주도한 것으로 지목됐다. 이 테러로 231명이 숨지고 50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미국은 25만 달러(약 29억원)의 현상금을 걸고 추적에 나섰다. 이집트는 99년 결석재판을 열어 사형을 선고했다.
알 자와히리는 알 카에다의 이론가이자 전략가로 꼽힌다. 9·11 테러도 그가 기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사 출신답게 빈 라덴의 주치의 역할도 하고 있다. 9·11 테러 이후 공개된 몇몇 비디오테이프에서 줄곧 빈 라덴 곁을 지켰다.
2001년 미국의 아프간 공격으로 알 자와히리의 수난은 시작됐다. 미군 공습으로 아내와 딸 3명을 잃었다. 그 역시 험준한 아프간 산악지역을 전전하며 미군과 동맹군의 추격을 받고 언제 잡힐지 모르는 신세가 됐다.
한편 알 카에다는 17일 7명이 죽고 30여명이 다친 바그다드 마운트 레바논호텔 폭탄공격은 자신들이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런던에서 발행되는 범아랍 일간지 앗샤르크 알 아우사트가 19일 보도했다.
이진기자 leej@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