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45개월 한국근무 마친 구즈먼 美대사관 부대변인

  • 입력 2003년 8월 3일 19시 05분


45개월간의 한국 근무를 마치고 3일 미국으로 돌아간 자니나 구즈먼 주한 미국대사관 부대변인(33·사진). 그녀의 가슴에 가장 소중히 새겨진 한국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매일 오전 4시경이면 (대사관 직원 관사) 인근 사찰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목탁소리, 출근길 버스정류장에 가노라면 물결처럼 마주치는 교복 입은 여고생들의 환한 재잘거림,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남대문시장의 부산한 아침….”

한미관계의 격동기였던 지난 1년간 부대변인으로서 한국민을 만나는 일선 창구였던 구즈먼씨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되새기는 서울의 이미지는 끝이 없었다.

“따뜻한 물이 넘치던 공중목욕탕, 매콤하고 달콤한 포장마차의 떡볶이…서울이 아니면 도저히 맛볼 수 없을 일상의 기쁨들이었어요.”

구즈먼씨는 1999년 10월 미 대사관 지역총괄 부담당관으로 한국에 왔다. 폐쇄된 지방 미 공보원의 업무까지 맡았기 때문에 지방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각 지역에서 만난 시민단체, 교육계 등의 많은 분들이 저마다 가장 자부심을 갖고 있는 고장의 진수(眞髓)들을 소개해 줬어요. 각 지역의 역사와 전통, 문화유산들을 배울 수 있었지요.”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을 수행해 북한 평양을 방문했을 때는 ‘역사의 현장에 참여하는 게’ 너무 기뻐서 깡충깡충 뛰었다고 한다.

그러다 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 파장이 한창이던 2002년 8월 부대변인에 임명됐다. 이어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논란, 촛불시위, 대통령선거, 북핵 위기 등 격랑 속에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이해를 넓히기 위해 뛰어야 했다. 공보과 역사상 가장 바쁜 시기였다고 다른 직원들은 귀띔했다.

구즈먼씨는 여중생 치사사건을 돌이키며 “정말 비극적인 일”이라고 가슴 아파했다.

“사건 후 커뮤니케이션 노력을 많이 했지만 어려움이 컸어요. 문화적 차이도 많이 느꼈고요.”

그 과정에서 미국의 정책에 매우 비판적인 단체나 인터넷 매체들과도 대화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그런 노력을 해보면 우리도 그분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그분들도 우리 말에 조금씩 귀를 기울여주더군요.”

하지만 TV에서 시위대가 성조기를 찢는 장면을 봤을 때는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한미간에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인 한미간의 유대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실 기쁜 기억들이 더 많아요. 월드컵 때 거리응원에 자주 참가했는데 안정환 선수가 슛을 성공시켰을 때 누군가 번쩍 안아 트럭에 태워줬어요. 트럭 위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몇 백m를 갔지요.”

프린스턴대에서 동아시아학을 전공하고 몬테레이국제학연구소에서 석사학위를 딴 구즈먼씨는 ‘서울 외교가의 신화처럼 여겨지는 미모’의 미혼. 하지만 그동안 한국 남자의 프러포즈를 한 번도 못 받아 봤다고 한다.

“(한국 총각들은 나에게 관심을 안 줬지만) 택시운전사 아저씨들은 제 나이를 말씀드리면 결혼 안 한 걸 우리 엄마보다 더 걱정해 주시더라고요.”

이기홍기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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