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이민 100년]<1>“못오를 나무없다” 좌절모르는 韓人들

  • 입력 2002년 12월 23일 18시 10분


지난주 뉴저지주에서 홍삼판매점 문을 연 조순철씨(왼쪽)가 도자기 및 민속제품 전시판매장을 운영 중인 부인 권순영씨와 함께 홍삼제품을 진열하고 있다.
지난주 뉴저지주에서 홍삼판매점 문을 연 조순철씨(왼쪽)가 도자기 및 민속제품 전시판매장을 운영 중인 부인 권순영씨와 함께 홍삼제품을 진열하고 있다.
《1902년 12월 22일 한인 102명을 태운 미 여객선 갤릭호가 제물포항을 떠났다. 갤릭호가 일본을 거쳐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기착한 때가 이듬해 1월13일. 한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진 지 10년만에 미주이민 100년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동아일보는 역사적인 100주년을 맞아 미국 내 한인사회를 다각도로 취재, 100년동안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미국 내 한인사회의 현재 모습, 그리고 바람직한 미래상을 조망하는 특별기획시리즈를 매주 1회씩 연재한다.》

“저건 내 거다, 저건 내 거다….”

3년 전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서 매물로 나온 유기농작물 전문 판매점 앞에서 김승호씨(38)는 매일 아침 100차례씩 외쳐댔다. 500여평의 매장이 당시 경영진 내부의 알력 끝에 도산 위기에 빠져 싼값에 나왔지만 그래도 400만달러(약 48억원). 김씨로서는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볼 필요도 없는 나무’였다.

“1987년 온 가족이 이민 와서 한국식품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모은 돈으로 주식투자를 하다 손해를 많이 봐서 낙심하고 있던 때였죠.”

미국인을 상대로 한 영업을 꿈꿔온 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과는 성공. 한국식품점을 운영하면서 매출을 10배로 키워 놓은 실적을 보여주면서 판매점 주인과 지역 은행장을 설득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신용으로 점포를 인수했다. ‘기회의 땅’에서 어엿한 회장이 된 김씨는 직원들에겐 25%의 이익분배를 약속해 매출을 세 배로 불렸고 3년 만에 매장도 네 개로 늘렸다. 연초 인터넷 공간에서 인기가 높았던 ‘아들에게 주는 교훈’이라는 글의 저자이기도 한 김씨는 “한국에 진출한 온라인 마켓을 더 키우고 휴스턴 매장 수도 더 늘릴 계획”이라며 새해 사업구상을 다듬고 있다.

무역회사 로드웨이 엔터프라이즈의 최수용 회장(66)은 33년째 뉴욕 맨해튼의 브로드웨이를 지키고 있는 ‘영원한 현역’이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18층 사무실로 출근해 로드웨이의 자금 상황, 도미니카의 봉제공장 가동 상황을 챙겨야 하루가 시작된다. “아직 은퇴할 생각은 없지만 새해부터는 현장업무에선 발을 좀 빼야겠다”고 그는 말한다.

“1969년 봉제회사 지사장으로 뉴욕에 첫발을 디딘 지 2년 만에 본사의 부도로 직원 3명은 현지에서 해산했습니다. 브루클린의 야채가게에서 일하면서 맨해튼에 사무실을 열고 국내 수출기업들과 거래를 시작했죠. 미국 바이어에게 당해 빼앗기게 된 물품을 되찾아주기도 했는데 브로드웨이의 유대인 바이어들은 ‘브로드웨이 킬러’라는 별명을 붙여주더군요.”

최 회장은 무역, 제조업, 부동산업에 이어 맨해튼에 리버티은행을 세워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사업 확장과 자녀교육 등 ‘뉴욕의 꿈’을 상당 폭 이루었다. 무리하게 욕심내지 않고 원칙대로 일해왔다는 최 회장은 이민생활에서 가장 큰 어려움으로 ‘외로움’을 꼽는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 혼자 대응해야 한다는 데 늘 부담감이 따랐고 한국에 갈 때마다 편안함을 만끽했다고 그는 회고한다.

1960년대 미국이 이민 문호를 개방하자 100년 전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이민 이후 한동안 위축됐던 한인 이민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1970년대 이후의 이민 물결은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의 코리아타운을 부쩍 키워놓았다. 2000년 미국 정부 통계로 107만명에 이르고 비공식으로는 150만명이 된다는 미국 내 한인들은 독특한 ‘코리안 아메리칸’ 사회를 형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세탁소, 델리, 청과소매점, 네일살롱, 식당…. 재산을 모으고 자녀교육을 남부럽지 않게 시킨 많은 한인들이 성공담을 이야기하면서 이민 초기의 고생담을 빠뜨리지 않는다. 영어가 잘 안돼 더 좋은 기회를 날렸다는 이민자도 많다. 주류사회의 친숙하지 않은 눈길을 피해가며 재산을 모으고 살아갈 공간을 확보해온 한인 1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아이들이 영어를 잘하니까 커서 주류사회에 진입하면 훨씬 좋아질 겁니다.”

심지어 스탠퍼드대 신기욱 교수(42·사회학)도 연세대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한 ‘국내파’여서 영어 때문에 고생했다. 워싱턴대 대학원 시절 한 교수로부터 “언어가 서툰 당신은 이 분야에서 별로 가망이 없어 보인다”는 냉정한 충고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기숙사로 돌아와 마음을 가라앉히고 연구에 몰두해 40대 초반에 명문 스탠퍼드의 교수로 스카우트됐다.

15년 이민생활을 하면서 한국문화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데 대해 안타까워하던 권순영씨(50·여)는 한국 알리기에 나섰다. 권씨는 “어느 정도 적자는 각오한다”며 작년 뉴저지주 리지필드의 한아름 슈퍼마켓에 이천 도자기 전시 및 판매장을 차렸다. 권씨는 내년엔 ‘이영희 현대한복’을 뉴욕 일대에 소개하고 판매하기 위한 준비에 바쁘다. 남편 조순철씨(50)는 21일 홍삼판매점 문을 열었다. 식품과 건강제품 유통업에 오래 종사하면서 미국인들이 중국에서 인삼 홍삼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 한국산 수입에 직접 나섰다.

취업, 유학, 투자, 한국 기피, 자녀교육…. 세월 따라 이민을 가는 이유도 계속 변해왔다. 이들의 꿈도 달라져왔다. 수년 전까지는 자녀 교육문제로 이민 길에 오르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 요즘은 30대 부부가 자신들의 꿈을 펼쳐보기 위해 미국행을 택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박필서 신세계이주공사 사장은 “요즘 이민자의 60%가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 사이”라고 말한다. 과거처럼 한국을 등지기보다는 한국 내에 재산을 일부 남겨놓고 이민을 떠나는 경우가 부쩍 늘어났다고 그는 말했다. 위험을 분산하는 ‘양다리 걸치기’인 셈이다.

취업이민 비자가 예정대로 나오면 3주 후 이민 길에 오르는 봉모(39·학원강사), 권모씨(38·교사) 부부는 요즘 잠을 설친다. 영주권을 받아놓고 미국 워싱턴 쪽으로 행선지까지 정했지만 돈벌이는 제대로 될지, 뜻한 대로 영어공부는 잘하게 될지, 머릿속을 맴도는 고민거리가 한둘이 아니다. 부부는 서로를 격려한다. ‘좋은 기회가 될 거야.’ 부부는 새로운 도전을 상상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청과업으로 꿈 이룬 김건중씨 부부▼

“우리 가족을 이만큼 키워준 신선한 새벽공기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뉴욕 헌츠포인트 터미널 마켓에서 과일도매상을 운영하는 김건중(오른쪽) 윤진중씨 부부.

뉴욕 일대에 과일과 야채를 공급하는 헌츠포인트 터미널마켓에서 열대과일 도매상점 ‘코리안 팜’을 운영하는 김건중(59), 윤진중씨(56) 부부는 ‘새로운 도전의 땅’에서 보낸 21년을 이렇게 간단히 표현한다. 오전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김 사장 부부는 4시에 출근해서 정오까지 일한다.

김 사장 가족은 한국에서 사업이 지지부진하고 전망도 밝지 않던 1981년 빈손으로 미국에 왔다. 트럭으로 소매점에 과일 배달을 시작한 지 몇 달만에 맨해튼에 나온 과일가게를 대부분 신용으로 인수했다. 부인 윤씨는 처음으로 직업일선에 뛰어들어 처음엔 튀김가게 등에서 일했고 나중엔 과일가게를 지켰다. 10년간 모은 자본으로 헌츠포인트로 진출해 도매가게를 낸 김 사장 부부는 질 좋은 열대과일을 다양하게 갖춰놓고 단골을 늘려가고 있다. 연간 매출은 500만달러(약 60억원) 이상.

김 사장은 “큰 욕심없이 미국에 왔고 부지런히 살다보니 다 잘 되더라”고 말했다. ‘자식농사’도 과일장사도 잘 됐다. 늘 바쁜 부모 곁에서 자녀들은 스스로 제 할 일을 다 해냈다. 큰딸 선정(미국명 써니·34)씨는 고교시절 일본에서 열린 국제미술대회에 미국대표로 출전해 우승하자 고교교사가 부모 대신 대학에 데리고 다니면서 공부시켰다. 하버드대학보다 입학이 어렵다는 쿠퍼유니온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미술을 공부한 그는 이 학교 출신인 남편 김재정 변호사(김&장 소속)를 따라 한국에 머물며 미술가로 활약 중이다.

컬럼비아대학을 나온 둘째딸 숙희씨(32)는 소설가다. 뉴욕 법정의 한국어 통역사로 일해본 뒤 쓴 소설 ‘통역사’가 내년 초 미국과 한국에서 출판된다. 김 사장은 “숙희가 뉴욕의 ‘샤우트’라는 잡지에 ‘주목받는 신인 5명’중 한 명으로 소개됐다”며 자랑한다. 고교시절 주니어부 골프대회 준우승의 성적을 거두기도 했던 아들 선익씨(29)는 미니투어 우승경력에도 불구하고 프로입문이 더뎌 최근 진로를 수정, 로스쿨에 진학할 예정이다.

30여년 역사의 헌츠포인트 도매시장을 거쳐간 한인들은 수만명. 현재 뉴욕 한인청과협회장인 장영식씨(65)가 1972년 소매점포를 차려 돈을 잘 번다는 소문이 난 것을 계기로 한인들의 청과업 진출이 꼬리를 물었다고 협회의 전홍규 봉사실장(66)은 설명했다. 현재 뉴욕 일대에서 청과 및 관련업에 종사하는 한인은 1700여명. 부인과 함께 하루 14시간씩 일하면서 뉴욕 브루클린 등에서 4개의 청과점포를 운영 중인 강성범 사장(52)은 “20여년간 드나들면서 발품을 팔고 신용을 쌓아온 헌츠포인트 시장은 우리 가족의 꿈의 터전”이라고 표현했다.

▼관련기사▼

- “태평양 건너엔 돈나무가…” 희망의 항해

▽'미주이민 100년' 기획 자문위원▽

김대실 영화감독

김석주 뉴욕한인회장

김영환 뉴욕 메리트크리너스 사장

김창원 미주한인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 총회장

데니 박 한국이민노동자상담소 사무국장

마이크 혼다 미국 연방하원의원

마이클 듀카키스 UCLA 교수

(전 미 민주당 대통령후보)

마혜화 워싱턴주 타코마 사회복지단체 MSM 대표

박기영 UCLA 교수

박남표 전 타코마 한인회장

서동성 로스앤젤레스 미주한인이민10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변호사

수산 안 안창호 선생 딸

신기욱 스탠퍼드대 교수

심인수 코리안 리소스센터 사무국장

양창영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사무총장

연인철 뉴저지 한인회장

유의영 칼스테이트대 교수

이덕희 미주한인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이익환 시애틀 지역 이민사연구회 회장

이종찬 미주한인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 한국위원장

이창래 프린스턴대 교수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

존 유 4·29폭동피해센터 소장

전홍규 뉴욕한인청과협회 봉사실장

정일화 덴버한인신문사 사장

찰스 김 한미연합회 사무국장

최수용 뉴욕 로드웨이 엔터프라이즈 회장

홍준식 전 서재필재단 회장·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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