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그후 1년]<1>그라운드 제로, 뉴욕 맨해튼

  • 입력 2002년 8월 25일 18시 08분


18일 세살짜리 아들과 함께 뉴욕 9·11테러 참사 현장을 찾은 이스라엘 관광객 일란 자켄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그라운드 제로’ 의 모습을 찍고 있다. - 뉴욕AP연합
18일 세살짜리 아들과 함께 뉴욕 9·11테러 참사 현장을 찾은 이스라엘 관광객 일란 자켄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그라운드 제로’ 의 모습을 찍고 있다. - 뉴욕AP연합
요즘 뉴욕 맨해튼의 그라운드 제로(폭심지·爆心地) 주변은 늘 붐빈다. 방문객이 하루 수만명. 간편한 옷차림의 가족 여행객이 특히 많다. 모두들 말이 없다. 웃음도 없다. 조지아주에서 자녀를 데리고 온 빅토르 크루즈(38) 가족도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던 바로 그곳, 세계무역센터(WTC) 빌딩 터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다.

문득 녹슨 철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다. WTC 건물 잔해 속에서 소방대원들에게 우연히 발견돼 WTC 터 동쪽 끝자락을 지금껏 지키고 있다. 건물 구조물의 한 부분이지만 맞춤제작이라도 한 듯 폐허와 잘 어울려 오히려 더 처연하다. 그렇다. 여기는 죽음의 땅이었다.

여행객들은 참배객이 되어 바로 옆의 세인트폴 채플을 찾는다. 채플 울타리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휘장과 기념품들로 빈틈이 없다. ‘늘 웃음을 던져주던 카즈씨’에 관한 신문기사, ‘실종자를 위하여’라는 시가 눈길을 붙잡는다. 그 옆으로 꽃 모자 종이학 성조기 인형들. 캘리포니아에서 온 루이스 질(41) 부부는 두 자녀에게 희생자들이 남기고 간 갖가지 사연들을 소곤소곤 설명해주고 있다. 자원봉사자 매기 쇼르는 펜 여러 개를 들고 메모를 남길 사람들을 기다린다.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WTC)의 재건축 모형도 가운데 하나 - 동아일보 자료사진

참배객 곁의 노점상들 손에는 거짓말처럼 주변의 높은 빌딩들보다 더 높이 솟은 WTC 빌딩 사진이 들려 있다. 뉴욕 경찰과 소방대 로고가 들어간 티셔츠의 ‘NO FEAR(두렵지 않다)’라는 글귀는 오히려 그날의 공포를 되살리게 하는 것 같다.

슬픔과 두려움은 영웅을 낳았다. 테러 사태 직후 헌혈을 위해 병원을 빙 둘러 줄을 섰던 이름 모를 시민들, 구조와 복구에 땀을 보탠 자원봉사자들….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 받던 소방대원과 경찰은 정밀진단 결과 통신두절과 현장배치 잘못 등으로 효율적인 구조를 하지 못하고 자체 희생을 키웠다는 평가가 최근에 나와 구조개편이 예정돼 있다.

세인트폴 채플에 기증된 지팡이에도 사연이 있다. 테러 사고 직후 뉴욕 퀸tm에 사는 중년부인이 찾아와 “다리를 다친 사람이 있다기에…”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쓰던 지팡이를 남기고 간 것.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 시장이 “용기 있게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가운데 그라운드 제로 주변의 주민들 모습에선 안정과 불안감이 교차하고 있다. 테러 직후 인근 아파트는 이삿짐 트럭이 끊이질 않았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큰 길 건너 남동쪽에 있는 배터리파크의 아파트 게이트웨이플라자는 1711가구 중 700가구가 떠나버렸다. 주변 26개 아파트의 45%가 새 입주자를 구하지 못했다. 집세가 25%가량 할인되고 당국의 입주자 지원금이 나오자 몇 달만에 아파트는 다시 차기 시작했다.

배터리파크의 부동산 관계자는 “현재 빈집은 5% 미만”이라며 “10개월 만에 도시가 새로 태어났다”고 말했다. 심지어 집세는 ‘9·11 테러’ 이전에 비해 10%가량 오른 상태다. 뉴욕시 부동산위원회 수석이코노미스트 그레그 헤임은 “‘9·11’ 영향이 오래가지 않아 모두들 놀랐다”고 말했다.

어린이가 있는 가정은 아직 이곳을 꺼린다. 배터리파크의 89공립초등학교는 9월 새학기에 학생수가 28% 줄어들게 됐다. 이 동네에 살던 루이스 그로스(37)는 “세 아이에 대한 불안감이 떠나지 않아서 200㎞ 떨어진 롱아일랜드의 몬톡으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WTC에서 북쪽으로 네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선스 델리는 WTC 건물 붕괴 한 달 반만에 문을 열었다. 이민생활 15년째인 지배인 이종배씨(39)는 “테러 이전에 자주 왕래했던 인근 델리점 11곳 중 4곳이 아직껏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주인구 5만명인 WTC에 의존하던 점포 상당수가 WTC의 붕괴와 함께 고객을 잃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

WTC에서 한 블록 떨어진 ‘첼시 진’이라는 청바지 가게엔 ‘9·11 테러’ 때 옷 위로 쌓인 두꺼운 먼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주인 데이비드 코헨은 “1만달러를 들여 4㎡ 넓이의 진열장을 기념물로 보존해 놓았는데 경기가 좋지 않아 가게 문을 닫아야 할 운명”이라며 서운해했다. 코헨씨는 쇼윈도에 ‘9·11의 흔적을 보존할 아이디어를 알려달라’고 써놓았다. ‘9·11’도 역사가 돼가고 있다.

블룸버그 시장은 WTC 건물 터에 새 건물을 짓는 프로젝트의 이름을 ‘출발점(Starting Point)’이라고 명명했다. 세계 최강 미국 경제의 상징물이 2819명의 생명과 함께 암울한 회색 먼지 속으로 가라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뉴욕을, 미국을 다시 세우자는 의미다.

제 미국에선 축제나 국경일이면 TV 긴급뉴스로 전해지는 테러 경고가 조금도 낯설지 않다. 교량과 터널, 그리고 지하철 폭파, 방사능 물질과 다이너마이트를 연결한 ‘더티밤’ 공격, 공기 정화조를 통한 화학무기 공격, 자살폭탄 등의 위협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일반 미국인에 대한 위협은 크게 줄었지만 미국 자체로는 여전히 테러 공격에 취약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래도 미국인들은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교육심리 전문가들은 어린 자녀가 ‘9·11’이나 WTC에 대해 물어 오면 “소방관과 경찰관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안전하다.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난다면 너는 어떻게 남을 도울래”라고 되물으라고 권한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9·11테러 일지▼

◇2001년

▽9월11일

△오전 8:46 AA11 여객기, 세계무역센터 (WTC) 노스 타워와 충돌

9:03 UA175 여객기, WTC 사우스 타워와 충돌

9:30 조지 W 부시 대통령, “테러 공격을 받았다”고 언급

9:43 AA77 여객기, 미 국방부 건물에 충돌

10:05 WTC 사우스타워 붕괴

10:10 UA93 여객기, 펜실베이니아 근교에 추락

10:29 WTC 노스타워 붕괴

△오후 4:00 CNN 등 ‘오사마 빈 라덴에게 혐의 있다’ 보도

▽9월14일 미 FBI, 항공기 납치 용의자 19명 명단 발표

▽10월7일 탈레반 정권, 빈 라덴 인도 거부. 미, 아프가니스탄 공격 개시

영국 동참. 빈 라덴은 성전 촉구

◇2002년

▽4월11일 알 카에다, 튀니지에서 테러 공격으로 19명 사망

▽5월30일 그라운드 제로 WTC 빌딩 잔해 제거 작업 완료

▽8월19일 뉴욕시, WTC 사망 및 실종자 2819명으로 최종 집계

▼뉴욕 첫 여성소방관 버크먼씨▼

“시민들이 우리를 마지막 보루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어려움에 빠진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느낌은 참 좋습니다.”

‘9·11 테러’ 현장에서 화재진압과 구조활동을 벌였던 뉴욕소방국(FDNY) 소속 여성 소방관 브렌다 버크먼(50·사진)은 22일 담담하게 말했다.

지난해 뉴욕 미드맨해튼의 래더(고가소방차)팀을 지휘했던 버크먼씨는 소방파출소장에서 캡틴(한국의 소방경이나 소방령에 해당)으로 승진해 두 달 전부터 브루클린의 소방국 본부 안전담당관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빨리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소방관은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세계무역센터(WTC)에서 숨진 300여명의 소방관 중 250명이 아는 얼굴입니다. 어제도 그 중 한 동료의 장례식에 참석했어요. 유가족이 최근에야 사망 사실을 받아들였지요.”

그의 눈이 여러 차례 허공을 향한다. WTC 빌딩 붕괴로 래더팀의 부하 직원 25명 가운데 3명,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던 엔진(펌프소방차)팀 20명 중 5명이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바로 그날 비번이었는데 항공기 충돌 소식에 놀라 현장으로 달려갔지요. 하늘을 가리던 빌딩은 어디 가고 온통 잿빛 세상이 되어 있었어요.”

장비도 물도 부족한 데다 동료의 사망 소식이 이어져 기진맥진했던 그의 눈에 든 것은 붉은 등불. 다시 보니 해였다. ‘그래, 해는 다시 뜨겠지’ 하면서 그는 희망을 생각했다.

버크먼씨는 1982년 FDNY가 처음으로 뽑은 여성 소방관이다. 여성을 뽑지 않던 FDNY를 상대로 위헌소송을 제기해 5년 만에 승소한 주인공이 바로 그다. 그러나 여성 소방관 채용은 점점 줄어 현재 1만1000명의 뉴욕 소방관 중 여성은 25명뿐이다. ‘9·11’ 이후 2000명을 충원했지만 여성은 단 한 명이었던 것이 버크먼 캡틴에겐 큰 불만이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이유로 소방관이 되고 싶어 하고 잘 할 수 있어요.”

미 전국 여성 소방관 모임 의장이기도 한 버크먼 캡틴은 거듭 강조했다. 서울소방본부의 경우 올해 화재진압 분야 90명 공채에 11명이 여성이었다. 그는 “한국에서도 여성 소방관들이 기술과 의지를 키워 멋진 활약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뉴욕대 법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그는 뉴욕 및 전국 소방학교 교관도 겸하고 있으며 미국 의회에서 ‘9·11 현장 상황’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2000년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 ‘불꽃’은 그를 모델로 한 것이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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