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특집]21세기 한-러 관계 새 이정표 놓는다

  • 입력 2001년 2월 22일 18시 33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7일 러시아 대통령으로는 8년여 만에 한국을 방문한다. 소련 해체 후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이 추락하고 경제파탄 등 극심한 사회혼란을 겪었던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의 집권 1년 동안 큰 변화를 보였다. ‘강한 러시아 재건’을 내세운 푸틴 대통령이 경제와 사회 질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국제무대에서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의욕적인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급변하고 있는 러시아의 실상을 살펴본다.》

▼경제-10년만에 침체기 탈출▼

1991년 소련 붕괴 후 해마다 추락을 거듭하던 러시아 경제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지명된 99년부터 거짓말처럼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러시아는 국내총생산(GDP) 7% 성장과 598억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등 10년 만에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이것을 푸틴 대통령의 업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2년 넘게 배럴당 30달러 안팎의 고유가가 계속되면서 석유수출이 GDP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석유 의존도가 높은 러시아 경제도 덩달아 살아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98년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 사태’로 루블화가 2년간 5배 가까이 폭락하는 바람에 러시아 제품의 수출 경쟁력이 생겨난 것도 경제 회복에 큰 몫을 했다. 이 덕분에 산업생산도 9%나 성장했다.

이런 ‘행운’으로 인해 푸틴 대통령은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지난해 대선에서 무난히 당선됐다.

푸틴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철도 에너지 부문 등 국가독점산업의 개혁과 조세 개혁, 투자환경 개선 등 각종 경제개혁에 나섰다. 하지만 지방정부와 올리가르흐(독점재벌)의 거센 저항에 부닥쳐 아직 개혁의 성과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러시아 경제의 완전한 재건을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과제도 만만찮다. 1700억달러에 이르는 외채와 연간 수십억달러의 외화유출이 가장 큰 문제.

또 푸틴 대통령에게 행운을 안겨줬던 ‘석유’가 오히려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외화 수입의 75%를 석유 등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바람에 정부재정 환율 외채상환 등이 모두 유가 하나에 달려 있는 취약한 경제구조가 됐기 때문이다.

이번 한―러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은 경제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할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최근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를 연결시키는 사업에 적극적이다. 러시아는 철도 연결 후 한국이 일정한 물류 수요를 보장해주면 직접 북한 철도의 현대화 사업에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러시아는 지난해 세계 최대의 이르쿠츠크 가스전 개발에 중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을 참여시켰다. 또 경협차관 상환과 연계해 방위산업 물자와 원자재의 대한(對韓) 수출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지난해 한국은 러시아에 가전 자동차 의류 식품 등을 수출하고 철강 알루미늄 등을 수입해 11억6000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무역 규모로만 본다면 한국과 러시아의 경제 협력은 아직 초기단계에 불과한 실정이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외교-정상회담통한 위상제고▼

러시아 외교는 푸틴 대통령 집권 1년 만에 말 그대로 확 달라졌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핵강국이면서도 국제무대에서 무기력했다. 경제 등 국내문제가 발목을 잡기도 했지만 병약한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이 외교 일선에 직접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적극적으로 정상외교를 펼쳤다.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비난하면서 ‘다극화된 국제질서’를 주장해 미국 등 서방과의 갈등이 우려되기도 했다.

푸틴 정부는 다른 한편으로 서방의 경제협력과 지원을 받기 위해 애쓰는 등 국익을 우선시 하는 실리 외교도 동시에 펴나갔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산하 미국캐나다연구소의 빅토르 크레메뉴크 부소장은 “안보와 군사 정책은 공격적으로 변했지만 서방의 지원 없이는 경제 회복이 힘들다는 점 때문에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지역적으로도 옐친 정부는 미국과 유럽에 외교적 관심을 집중했지만 푸틴 정부는 중국 인도 북한 등 옛 동맹국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고 있다. 올 상반기 러시아 정상외교도 바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질 예정. 27일 푸틴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시작으로 다음달 25일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러―일 정상회담이 열리고 4월경엔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한다.

러시아의 대(對) 한반도 정책도 변했다. 옐친 정부는 친(親) 한국 일변도의 외교로 북한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러시아 최고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북―러 관계 복원을 시도하는 등 철저히 균형 외교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안정이 자국의 안보 및 국익과 일치한다는 러시아의 기본 인식은 변함 없다. 산적한 국내 문제로 인해 한반도에 분쟁이 일어나면 적극 개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푸틴 정부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희망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러시아는 국내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인 극동 및 시베리아 개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의 연결, 이르쿠츠크 가스전의 개발 등 이 지역의 개발을 앞당길 수 있는 대형 사업 추진에 적극적이다.

이번 한―러 정상회담에서도 푸틴 대통령은 이 분야에 대한 한국의 투자와 협력을 끌어내는 데 최대의 역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군사-"옛 영화 재건" 핵무기 전면배치 훈련강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일 러시아를 찾은 조지 로버트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사무총장에게 “러시아는 NATO의 동진(東進)과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NMD)체제 구축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중부 유럽국가와 발트 3국의 NATO 가입과 NMD에 어느 정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푸틴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오랜 기간 ‘동면(冬眠)’에 들었던 러시아군도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러시아군은 16일 바다와 육지, 공중에서 일제히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시험을 강행했다.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장거리 전략폭격기인 투폴레프 95(일명 블랙잭)와 핵잠수함도 동원됐다.

ICBM 발사 시험에는 육해공군과 전략군이 모두 참가했으며 미국 및 NATO 군과의 충돌도 가상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종의 서방에 대한 경고이자 위협인 셈이다.

최근 러시아가 주변국의 영공을 침범하는 사례가 잦아지고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14일 러시아는 전략폭격기들을 동원해 일본과 노르웨이의 영공을 침범했다.

이 같은 군사적 움직임은 사실 지난해부터 서서히 싹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러시아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북극지역에 투폴레프 95를 배치해 훈련을 실시했다.

또 지난해 상트 페테르부르크 인근에 있던 전술핵무기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의 접경인 칼리닌그라드로 전진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해군력의 활동 강화도 예사롭지 않다. 태평양 함대는 그동안 이렇다할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지난달 15일 우달로이급 전함인 비노그라도프호와 판텔레예프호를 인도와 베트남으로 출항시켰다. 이 같은 장거리 임무는 근 5년 만에 처음이다.

<윤양섭기자>lailai@donga.com

▼푸틴의 사람들은…동향-KGB인맥 전면 포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49)의 집권으로 러시아의 권력 판도가 하루아침에 변했다. 30, 40대의

낯선 인물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구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에서 15년간 일했던 푸틴 대통령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페테르 마피아’라고 불리는 동향(同鄕) 출신과 KGB 인맥이 포진했다.

헌법상 2인자는 미하일 카시야노프 총리(43). 재무부 장관과 경제부총리를 거친 경제관료 출신으로 대외 채무 해결을 위한 협상을 도맡고 있어 서방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관료 출신이란 한계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해 자주 실각설에 시달리고 있다.

최고 실세는 세르게이 이바노프 안보회의 서기(48)다. 푸틴 대통령의 고향 친구이며 KGB에서 함께 근무했다. 푸틴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가장 신뢰하는 친구’로 지목했을 정도. 안보회의는 대통령을 의장으로 주요 각료들이 안보문제와 대외정책을 결정짓는 핵심 권력기구다. 푸틴 대통령도 총리가 되기 전 안보회의 서기를 지낸지라 가장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꼽힌다.

푸틴 대통령을 수행해 한국을 방문하는 게르만 그레프 경제발전 및 통상부 장관(37)은 경제 분야의 실세. 독일계로 역시 푸틴 대통령의 고향 후배이며 ‘푸티노믹스’로 불리는 신경제정책을 설계했다. 급진적인 시장개혁주의자로 서방의 지지를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방한했던 세르게이 스테파신 감사원장(48)은 한때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푸틴 대통령과 경쟁했던 관계. 차기 총리나 푸틴 대통령의 잠재적인 후계자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공안기관 출신이며 푸틴 대통령보다 먼저 연방보안부장과 총리를 지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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