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DJ 감형때 韓美 밀약"…산케이신문 보도

  • 입력 2000년 4월 17일 11시 52분


1980년 광주사건과 관련,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사형판결을 받았을 당시 미대통령 당선자인 로널드 레이건씨가 `밀사'를 보내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을 설득, 감형에 동의토록 했던 밀약이 밝혀졌다고 산케이(産經)신문이 17일 미일 양국정부의 전 고위관리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신문은 "교환조건은 미국측이 전대통령의 방미를 실현시켜 全정권에 대한 인지(認知)와 지원을 국내외에 표명한다는 것이었다"면서 "김대중씨의 감형을 놓고 출범전의 레이건 정권과 전정권에 의한 정치적 거래가 드러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레이건당선자는 취임 전 정권인수팀의 외교문제 책임자인 리처드 앨런씨를 파견, 협상을 마무리했다.

신문에 의하면 80년 12월 지미 카터정권 내부에서는 관계자가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 전정권의 정보담당 보좌관과 회담하고 "형이 집행되면 미국의 전정권에 대한 지원은 불가능하다"고 경고하고 이미 1, 2심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김대중씨의 처우에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한국측은 감형 조건으로 ▲워싱턴에서 한미정상회담을 열어 미국이 전정권에 대한 인지를 선명하게 하고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한국지원 태도를 명확히 한다는 것 등을 제시했다. 당시 선거를 거치지 않고 권력을 수중에 넣은 전두환정권은 국제적인 지지를 얻어 정권기반을 다질 필요가 있었다.

미국측은 이 요구를 받아 들이기로 결정, 레이건 정권이 정식으로 발족한 다음날인 81년1월21일 전대통령의 방미초정을 발표했다. 또 한국 대법원은 다음 다음날 김대중씨에게 사형판결을 내렸으나 한국정부는 미국과의 약속에 따라 같은 날 곧바로 무기 금고로 감형을 결정했다. 그후 김대중씨는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형의 집행이 정지됐다.

레이건 정권이 김대중씨의 사형집행 회피에 전력을 기울인 것은 ▲한국의 민주화 후퇴를 우려한데다 ▲실제로 사형이 집행됐을 경우 그 배후에서 미국이 책동했다는 억측을 한국민들 사이에 불러일으키고 그 반발로 인해 주한미군의 유지가 곤란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신문은 설명했다.

산케이는 "광주사건 당시 주한미군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항의를 강경하게 봉쇄한 한국군의 행동을 묵인, 이해를 나타낸 것으로 전해졌다"면서 "여기에서 김대중씨의 사형이 집행될 경우 이 것도 미국의 시사(示唆)에 의한 것이라고 한국민이 오해해 반발이 더욱더 드세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고 말했다.

전대통령의 방미는 2월2일에 실현됐으며 국빈 방문만은 보류되고 그 다음 수준의 예우가 부여됐다.

[도쿄= 연합뉴스 문영식특파원] yungshik@yonha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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