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정권교체]獄苦역경 이긴 '조용한 투사' 천수이볜

  • 입력 2000년 3월 19일 19시 59분


대만 사상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한 천수이볜(陳水扁·49)당선자의 성격은 ‘조용한 투사(鬪士)’라는 표현으로 잘 설명이 된다.

그는 유수한 해사법 전문 법률회사에 소속된 변호사로서 창창한 앞길을 포기하고 정치에 입문했으나 장기간 옥고와 낙선의 험로를 걸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투사로서, 정치인으로서 자신을 단련했다.

▼일용잡부 아들로 태어나▼

1951년 일용잡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천당선자는 점심을 거를 만큼 빈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어려운 면학의 과정을 거쳐 국립대만대학에 진학했다. 3학년에 재학 중 최우수 성적으로 법률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부유한 의사집안의 딸과 결혼, 순탄한 길을 걷던 천 당선자는 79년 선동혐의로 군법재판정에 선 ‘야당의 대부’ 황신제(黃信介)의 변론을 맡으면서 정치에 눈을 떴다. 당시 함께 변론을 맡은 여성 변호사가 이번에 그의 러닝메이트로 나서 여성 최초의 부총통이 된 뤼슈롄(呂秀蓮·56).

그의 정계 데뷔 무대는 81년 타이베이 시의원 선거. 무난히 당선된 그는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으나 85년 고향인 남부 타이난(臺南)에서 낙선한 데 이어 부인 우수전(吳淑珍·49)여사가 교통사고로 두 다리가 마비되는 등 시련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86년에는 반체제 잡지 제작에 참여한 혐의로 투옥돼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87년 민진당에 입당한 그는 탁월한 지적 능력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력적 활동을 바탕으로 당내 스타로 떠올랐으며 두 차례의 입법의원선거에 이어 94년 타이베이시장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총통후보로 떠올랐다. 시장재직시 천당선자는 퇴폐이발소와 매춘 등 ‘8대 업종’을 일소하는가 하면 공원 건립을 위해 아파트 거주자들을 몰아내는 등의 파격적인 행정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많은 반대파들이 생겨 그는 98년 시장 재선에 실패했다.

▼독립 밀어부치지 않을듯▼

천당선자를 잘 아는 주위인물들은 낙선의 경험이 그가 오늘날 총통이 되는 데 좋은 자양분이 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실패를 경험삼아 원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타협할 줄 아는 ‘유연한’ 정치인으로 거듭났다는 것.

이 때문에 주위에서는 그가 당선 이전에 표방한 대만독립을 강하게 밀어붙이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무엇보다 대만인들이 원하는 것은 중국과의 전쟁을 불사하면서 대만의 독립을 지키거나 추진하는 것보다는 피 흘리지 않는 안정과 평화라는 것을 그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들은 분석한다.

<홍은택기자>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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