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문화리포트]베를린 미테/統獨 예술의 메카

  • 입력 2000년 2월 28일 23시 10분


《올해 통일 10돌을 맞은 독일, 지난해 독일의 수도가 된 베를린. 통일은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의 문화 예술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세계 최후의 분단국인 한국의 입장에선 더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통일 이후 10년간 베를린이 겪어온 문화적 발전양상, 문화재 복원 현황 등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독일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슈프레강 북쪽의 ‘베를린 미테’(이하 미테) 지역은 묘한 분위기로 낯선 방문객들을 사로잡는다. 17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시커먼 더께를 이고 금방 내려앉을 듯 서 있는 길의 모퉁이를 돌아가면 외벽을 유리로 마감한 세련된 화랑이 발길을 맞는다. 미테의 공기에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버려진 듯한 황폐함과 곳곳의 신축 건물들이 풍기는 진취적인 기운이 뒤섞여 있다.

통일전 동베를린에 속했던 미테는 ‘중앙(Mitte)’이라는 말 그대로 베를린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구(區)이자 현대미술과 공연예술의 메카. 통일후 예술가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10년의 세월을 지나 이제는 수도 베를린의 문화 중심지가 됐다.

미테의 문화적 성지는 단연 현대미술가들의 집결지인 ‘타켈레스’와 문화복합센터 ‘하케센 회페’. 둘 다 거의 100년 전에 지어진 건물로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폐허가 된 곳. 그러나 이듬해 젊은 예술가들이 ‘빈 집 무단점거 운동’을 벌여 자신들의 예술적 영토로 삼았다. 장벽으로 동, 서가 나뉜 채 수 십 년 간 ‘버려진 도시’였던 베를린의 상처가 문화적 성장의 밑거름이 된 셈이다.

안마당을 사면의 건물이 에워싼 형태의 ‘하케센 회페’에는 공연장인 ‘카멜레온 바리에테’와 건축미술 전문화랑 ‘아에데스’를 비롯한 화랑들, 예술도서 전문서점, 영화관 등이 있다. 곧 판토마임 전용 극장과 유대인 음악 전문 공연장도 들어설 예정.

‘하케센 회페’가 있는 로젠탈러 거리와 ‘타켈레스’가 있는 오라니엔부르크 거리를 잇는 아우구스트 거리 주변에는 40여개의 화랑이 밀집해 있다. 한때 ‘가난한 거리’로 불린 이곳은 저소득층의 주거지였지만 지금은 서울 인사동과 청담동 화랑골목을 합쳐놓은 듯한 분위기의 화랑가로 변모했다.

알베르히트 거리에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설립한 ‘베를리너 앙상블’과 운터 덴 린덴 거리 부근의 ‘막심 고리키 극장’도 보수 후 재개관돼 공연의 중심지가 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이 확정된 슈프레 강의 ‘박물관의 섬’도 미테 안에 있다. 구 서베를린 지역에 있는 세계적 명성의 베를린 필하모니와 함께 미테는 19세기 ‘슈프레 강가의 아테네’로 불릴만큼 이름난 문화도시였던 베를린의 옛 명성을 복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광의 이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낡은 건물이 많은 미테가 통일 후 문화 중심지가 된 이유 중 하나는 싼 임대료. 통일 직후 미테의 건물 임대료는 1㎡당 5마르크(원화 약 3000원)에 불과했다. 이는 미테의 버려진 듯한 분위기에 매료된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몰려들어 다양한 장르의 하위문화를 발달시키는 기반이 됐다.

그러나 미테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2, 3년 전부터 서독 출신의 부유한 투자가들이 몰려오고 쾰른의 고급 화랑들이 속속 옮겨오면서 미테는 고급의 엘리트 문화지구로 변모하는 중. 격주간지 ‘샤이니쉬 라그’ 편집장 울리케 스테그리히는 “거칠지만 창의성이 번뜩이던 예술가들 중 일부는 “더 이상 미테는 없다”며 떠나고 저소득층의 주거지였던 거리에 고급 화랑, 상가가 들어서면서 원주민도 밀려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독 출신의 부유한 여피들이 풍요한 문화를 향유하는 고급 화랑 뒤편의 비좁은 골목에는 치솟는 집세 때문에 밤잠을 못이루는 동독 출신의 가난한 이웃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미테의 풍경이 되었다. 늦은 밤, 인적이 드문 미테의 오라니엔부르크 거리에는 영하를 밑도는 날씨에도 금발의 창녀들이 지나가는 자동차에 손짓을 하며 서 있었다. 이 또한 통일이후 베를린의 문화적 얼굴이 된 미테의 그늘진 표정 가운데 하나가 아닐는지.

▼베를린 미테의 '타켈레스'는▼

‘베를린 미테’의 오라니엔부르크 거리에 있는 ‘타켈레스’는 건물 뒷면 벽이 부서지고 빈민굴처럼 흉한 몰골을 한 5층 높이의 거대한 장방형 건물. 그러나 이 폐허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통일된 베를린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원래 ‘타켈레스’는 1909년에 지어진 대형 백화점. 동베를린 시절,백화점 기능을 상실한 뒤 폐허로 방치됐으나 통일 이후 서독에서 몰려온 미술작가들이 무단 점거해 작업 공간으로 삼으면서 아방가르드 미술의 근거지가 됐다.

‘타켈레스’가 유명해진 것은 1996년 이 건물을 산 스웨덴 회사가 재개발을 시도하면서부터. ‘타켈레스’의 예술가들은 2년간 건물 철거에 맞서 싸웠고 결국 1998년 ‘문화공간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독일 연방정부의 중재를 이끌어내며 승리했다. 그 해 11월부터 ‘타켈레스’의 예술인들은 스웨덴 회사에 임대료를 내고 있지만 1인당 임대료는 월 1마르크(원화 약 600원)에 불과하다. 현재 ‘타켈레스’에는 27개의 아틀리에와 영화관 1개, 공연장 1개, 극장식 카페 ‘자파타’, 금속공예 작업장 2개가 있고 90여명의 예술인이 입주해 있다. 3,4층에서는 공동전시회가 열리고 극장식 카페 ‘자파타’에서는 테크노 음악, 록,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매일 밤 열린다. 금속공예 작업장 ‘갤러리 오프넷’에서 일하던 한 공예가는 “누구든 ‘타켈레스’에 오고 싶으면 작품을 보여주고 신청만 하면 된다. 유럽인 뿐 아니라 중국 일본 아프리카에서 온 화가들도 있다”고 말했다. 입주자 선발에 특정한 기준도 없고, 작품활동에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이 곳의 특징.

그러나 10년의 세월을 보내며 ‘타켈레스’도 점차 변하고 있다. 이 곳에 사는 헤닝 그루너는 “초기 ‘타켈레스’의 예술인들에게는 반(反)자본주의, 반(反)독일연방같은 정치예술적 성향이 강했지만 98년 안정을 찾은 이후 달라졌다. 또 무명의 젊은 예술가들보다 성공한 엘리트 예술가들이 점점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성공한 예술가 그룹을 중심으로 세계에 ‘타켈레스’ 그룹을 만들기 위해 파리에 부지를 물색 중인 것도 중대한 변화 가운데 하나다.

▼인터뷰/문화전문지 '샤인쉬 라그' 편집장 스테그리히▼

“통일은 문화발전을 위해 잘된 일이긴 하나 다른 유럽 대도시와 달리 베를린의 고유한 문화적 개성이 사라지는 것같아 안타깝다.”

통일되던 해인 1990년 창간된 베를린미테의 격주간 문화지 ‘샤인쉬 라그’의 편집장 울리케 스테그리히는 “통일이 베를린의 문화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베를린에는 전환기의 불확실성과 모호함이 주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지만 통일 이후 거대 메트로폴리스를 지향하며 그런 개성을 거의 잃었다”고 답했다.

“유럽의 중앙에 있는 베를린은 동,서유럽 문화가 만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지만 이젠 그런 기회도 사라졌다. 동,서 유럽 영화의 가교 역할을 해 왔지만 이제 할리우드 영화의 파티장이 된 베를린 영화제를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동베를린 출신으로 베를린 미테에 오래 살아온 그는 “뉴욕의 소호처럼 고급스럽게 변해가는 미테에 기존 주민들이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40년 이상 모든 게 다르게 살아왔는데 문화적인 이질감이 전혀 없을 수 있겠는가. 동,서독 간 책전시회와 콘서트 교류는 통일 직전에야 시작됐는데 문화적 공감의 폭을 넓히기 위한 노력이 좀 더 일찍 시작됐어야 했다.”

<베를린=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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