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돕기 캠페인’ 좌담회]“지구촌 시민으로 거듭나길…”

  • 입력 1999년 9월 28일 19시 40분


《‘터키의 아픔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동아일보사가 공동 주관한 ‘비탄의 땅 터키를 도웁시다’ 캠페인이 30일로 일단 마무리된다. 국내에선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 ‘민간 주도의 외국지원 캠페인’은 한달 이상 진행되면서 숱한 화제를 남기는 가운데 시민운동의 지평을 넓힌 사례로 기록됐다. 이시형(李時炯)‘터키의 아픔을…’모임 대표와 이동원(李東援)지구촌학회장, 이희수(李熙秀)교수, 김대성(金大成)교수의 좌담을 통해 이 운동의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를 짚어본다.》

▽이시형대표〓지난달 터키에서 대지진이 일어나자 우리 정부는 7만달러의 지원금을 보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지원금 액수가 턱없이 적다며 연일 정부를 성토하는 분위기였지요.

당시 정부 입장이 딱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집중호우로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고 경제위기로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몇몇 사람이 ‘민간이 나서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터키가 6·25전쟁때 우리를 도운 우방이기도 하지만 세계시민으로서 양식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터키의 아픔을…’모임을 만들면서 전직 총리 3명을 포함해 50여명에게 전화로 참여를 부탁했는데 한명도 주저하지 않고 동참을 약속했습니다. 게다가 동아일보사가 적극 나서줘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터키대사 눈물 글썽여▼

▽김대성교수〓6·25전쟁때 터키는 1만5000여명을 파병해 그중 721명이 전사하고 234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175명이 행방불명됐습니다. 부상자는 2147명이나 되지요. 터키사람들은 자신들이 피 흘려 지켜준 나라는 형제라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당시 참전용사 가운데 국가지도자가 된 사람도 여럿입니다.

또 터키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우방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터키에 대한 우리 정부의 태도는 냉담하기만 했습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터키를 공식방문한 사람이 한명도 없다는 사실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희수교수〓정부가 지원금을 보낸 뒤 할릴 다으 주한 터키대사가 본국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터키에서 ‘한국인들이 우리를 잊었다’고 분노하는 분위기도 있었고요. 그러나 민간차원의 캠페인이 큰 호응을 얻자 다으대사는 ‘세계 어느 나라에 나가 있는 외교관보다 행복하다’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이대표〓캠페인이 시작된 직후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에서 터키군과 함께 싸웠다는 한 상이군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세가 불리해 한국군이 철수를 하는데도 터키군은 끝까지 남아 싸우다 결국 전멸했다는 겁니다. 자신은 터키를 돕고 싶지만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는데 후배들이 나서줘서 정말 고맙다며 울먹이더군요. 전화를 받고나서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교수〓캠페인을 시작할 때 수해 이재민돕기사업이 채 끝나지 않은 시점이라 조심스러운 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웃과 아픔을 나누는 우리 전통에 비추어 동기만 부여되면 국민이 나서줄 것으로 확신했고 그 예상은 결국 들어맞았습니다.

▽이대표〓이번에 모금된 성금 가운데 소액 성금이 많았다는 점이 특히 흐뭇합니다. 정말 많은 국민이 동참했어요. 현대백화점에서 열렸던 특별바자도 호응이 뜨거웠습니다. 연예인을 포함해 100여명의 유명인사가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백화점 개점 이래 하루 행사로는 최대 규모의 매출액을 올렸습니다.

쇼핑 나왔다가 별도로 마련된 모금함에 성금을 넣는 주부도 많았습니다. 또 이 기회를 통해 스케줄을 바꿔 행사장을 마련해준 백화점측과 식사까지 걸러가며 애써준 자원봉사 학생들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시민의식 성숙 계기로▼

▽이동원회장〓당시 저도 수업이 끝난 뒤 학생들을 데리고 행사장에 갔는데 봉사활동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봉사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은 것이 아닌가요. 이번 터키돕기운동도 그렇습니다. 성금으로 터키인들이 받게 될 도움은 별로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시민의식이 세계수준으로 성숙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우리 국민이 얻은 게 더 많다고 봐야지요. 저는 외국에서 우리 동포가 차별받는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솔직히 양심이 찔렸습니다. 화교문제만 보더라도 우리 민족의 폐쇄성과 이기주의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까. 세계의 물결이 국가 중심의 구조를 넘어서는 이 즈음에 이번 캠페인을 계기로 세계로 눈을 돌리는 의식개혁을 이뤄야 합니다.

▽이대표〓세계의식은 생존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이젠 외국을 ‘친구인 동시에 경쟁자’로 인식할 때입니다. 한국도 이제 세계 10대 교역국이 아닙니까.

▽이교수〓사실 우리는 밀접한 관계의 강대국이 아닌 여타 나라들에 대해선 정보 자체가 빈약합니다. 국내에 지역 전문가도 극히 적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같은 사태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지요. 세계 각 지역의 전문가를 양성해 국제적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이들의 의견을 듣고 대처한다면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이대표〓해외 현지의 동포들을 활용해 ‘지역전문가 인력 풀’을 만들어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해외와 국내를 잇는 네트워크를 조직해 빠른 시일내에 우리 국민이 국제감각을 익힐 수 있도록 하는 거지요. 이는 국가적인 사업이기도 하지만 민간운동으로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김교수〓외국에서 큰 재난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정부의 지원체계도 너무 허술한 것 같습니다. 터키 대지진이 일어나자마자 현지 자원봉사를 자원한 대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부 부처간 업무협조가 늦어져 결국 현지행이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이회장〓대만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미국 하버드대 기숙사에서는 대만출신 학생들이 고국에 무료로 안부전화를 걸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젠 외국에서 대규모 재난이 일어날 경우 인도적인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태세와 구조를 갖춰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국재난 외면 말아야▼

▽김교수〓실제 이번 캠페인은 터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흔한 일이 아니다 보니 외국인들에게 대단히 큰 인상을 심어준 것 같습니다. 한국외국어대에 근무하는 외국인교수 가운데 ‘이번 캠페인을 보고 한국에 대한 인식과 기대가 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국내사정도 어려운데 외국의 아픔을 기꺼이 나누는 것을 보니 한국이 ‘보다 가까운 이웃’으로 느껴진다며 다음에 자기네 나라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도 좀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이교수〓그동안 우리 국민은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훈련을 쌓지 못했습니다.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와 그 시민은 세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주관과 편견으로 다른 이를 평가하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발상의 전환’을 이룰 필요가 있습니다.

▽이회장〓동감입니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정체성이 자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동안 우리는 남의 눈치만 살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번 캠페인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운동의 겉모습은 바뀌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지구촌의 시민으로 거듭나자’는 정신만은 계승해 지속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면 합니다.

〈정리〓홍성철기자〉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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