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굴의 성녀」테레사 수녀의 삶은 끝없는 사랑 희생 봉사의 일생이었다. 그것은 「가난한 예수」를 위한 한평생이기도 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필 때마다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 예수를 보살핀다고 믿었고 동료 수녀들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손에 네 손을 얹고 그와 함께 걸어가라』
고향 알바니아의 스코페(지금은 마케도니아의 수도)를 떠나 아일랜드의 수녀원으로 가는 18세의 소녀에게 어머니는 그렇게 당부했었다.
수녀가 된 테레사가 인도 캘커타에서 처음 한 일은 여자고등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치는 일이었고 교장까지 지냈다. 그러나 그는 피정을 위해 다질링으로 가는 기차속에서 「부르심 가운데 또하나의 부르심」을 또렷이 들었다. 수녀원을 떠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그들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1948년 그가 인도된 곳은 캘커타의 빈민가였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캘커타시로부터 힌두교의 칼리신을 모시던 폐사원 한 구석을 얻어 고아 나환자 무의탁노인 등 버림받은 모든 이들을 불러 모았다. 「사랑의 선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사랑의 선교회」는 전세계로 뻗어나갔고 테레사수녀의 사랑을 전파했다. 그가 선교회 활동을 해나가는데 가장 큰 자산은 도움의 손길들이었다. 여고 교사시절의 제자들이 나섰고 「사랑의 선교회」가 커짐에 따라 수천명이 봉사를 자원해왔다.
7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을 때 언론들은 「일체의 비판과 비방에서 해방된 인물」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극단적인 청빈함은 일부 교파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64년 캘커타를 방문한 교황 바오로 6세가 흰색리무진을 기증했을 때 그는 교황의 선물을 팔았다. 나환자 수용소 건립을 위해서였다. 노벨평화상 상금 19만달러도 나환자 수용소 건설을 위해 내놓았다.
96년 11월 심장마비로 입원했을 때 그는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냥 죽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많은 사람들이 병원 문턱에 가보지도 못한 채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 대한 간호가 과분하다는 이유에서였다.〈김진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