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만 학살 「폴 포트」, 목숨 구걸

  • 입력 1997년 7월 31일 20시 57분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주범 폴 포트는 지난 25일 「정글재판」을 받기 전 한때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였던 크메르루주 지도자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애걸했다. 18년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폴 포트의 근황을 세상에 알린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誌)의 네이트 테이어 기자는 31일 발행된 최신호에서 폴 포트와 관련된 여러가지 역사적 비화를 상세히 밝혔다. ▼ 훈센의 쿠데타 내막 ▼ 지난달 5일 오후3시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은 갑자기 요란한 포성에 휩싸였다. 라나리드 제1총리측과 훈 센 제2총리측간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었으나 무력충돌은 갑작스럽게 발생했다. 훈 센총리측이 라나리드총리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였음이 곧 밝혀졌으나 왜 5일을 「D데이」로 잡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크메르루주 지도자들과 라나리드 제1총리측간에 진행돼온 수개월간에 걸친 연합전선구성 및 평화협상이 쿠데타가 발생한 바로 전날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훈 센총리측은 세불리를 우려하던중 때마침 라나리드총리가 출국한 직후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 크메르루주내의 권력투쟁과 폴 포트의 배반 ▼ 지난 78 년 12 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20년간 반정부활동을 해온 크메르루주 세력은 폴 포트의 철권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폴 포트는 자신의 최측근들과도 의논하지 않고 독선으로 치달아 조직내부에서 반감을 사게 됐다. 특히 올초부터 손 센 전국방장관과 키우 삼판 등 일부 세력들은 라나리드 제1총리측과의 연대를 통해 정부와 평화협상을 체결코자 했으나 끝내 반대했다. 이탈세력이 늘어나 고립되어 가는 것을 느낀 폴 포트는 지난달 9일 0시15분경 손 센과 그의 가족 14명을 길에 뉘어 놓고 20여명의 병사들이 탄 트럭으로 살해하도록 직접 명령했다. 이 사건은 큰 충격을 주어 그를 추종하던 3백여명의 지지자들마저 그를 떠나자 폴 포트는 밀림으로 달아나다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됐다. 크메르루주가 지난 4일 라나리드총리측과의 연대 및 평화협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은 폴 포트가 체포된 뒤로 내부의 권력투쟁이 일단락됐기 때문이었다. ▼ 폴 포트의 실체 ▼ 폴 포트가 지난 75년 론 놀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후 이듬해 「민주캄푸치아」로 국명을 바꿀때까지도 서방의 정보기관들조차 실권자가 누구인지 모를만큼 그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지난 25년5월 콤폼통에서 출생, 72세로 지금까지 알려진 69세보다 세살이 많으며 본명은 사로트 사르. 폴 포트가 집권후 「농민천국」을 구현한다며 일으킨 킬링필드 광풍은 그가 지난 65년부터 66년까지 5개월여간 중국에 머물며 목격한 「문화혁명」에서 영향을 받은 것임이 밝혔졌다. 당시 4인방의 급진적 운동에 깊이 심취했다. 75년 집권후 북경을 다시 방문, 毛澤東(모택동)을 만나 극찬과 함께 「속도있는 혁명」을 추진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프놈펜으로 돌아온 그는 지식인을 비롯해 위협세력을 처형하면서 도시민을 대대적으로 농촌으로 내몰았고 자신의 견해에 반대하는 동료를 비롯해 3년8개월20일동안 2백여만명을 고문 처형 기아 질병으로 숨지게 했다. 이후 친베트남 정권이 들어서면서 폴 포트는 정글로 달아났고 그에게는 「코드네임 81」로 지난 6월 체포될 때까지 수배중이었다. ▼ 크메르루주의 장래 ▼ 반군들 은 이제 폴 포트를 따르던 「크메르루주」가 아니며 「민족동맹당(NSP)」으로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그들은 훈 센총리와 베트남세력을 캄보디아에서 몰아내는데 앞으로의 투쟁목표를 정했다. 반군은 현재 전직 외교관 키우 삼판, 타 목장군 등 9명으로 구성된 상설위원회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구자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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