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와 대인관계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문제없이 사회생활을 이어가지만, 내면에서는 우울감과 공허감을 겪을 수 있다. 고기능 우울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발견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다. 게티이미지뱅크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늘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는 사람이 있다. 회사에서는 책임감 있다는 평가를 받고, 주변에서는 “너는 참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정작 혼자 남으면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과 피로감이 밀려온다면, 단순한 성격 문제만은 아닐 수 있다.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정신과 전문의 주디스 조지프 박사는 최근 비즈니스인사이더와의 인터뷰에서 만성적으로 타인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는 ‘피플 플리저(People-pleaser)’ 성향이 고기능 우울증을 가리는 가면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기능 우울증은 미국정신의학회(APA)가 발간한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에 포함된 공식 진단명은 아니다. 다만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겉보기에는 별문제 없이 일상을 살아가지만 내면에서는 공허감과 무기력, 절망감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상태를 설명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 성과는 내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조지프 박사에 따르면 고기능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대체로 책임감이 강하고 업무 수행 능력도 뛰어나다.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승진하거나 목표를 달성하는 데도 큰 어려움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들에게 성취가 반드시 기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본인은 왜 아무것도 즐겁지 않은지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조지프 박사는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과 단지 하루를 버티기 위해 끊임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은 다르다”며 “즐거움이 아닌 생존을 위해 자신을 몰아붙이는 모습은 우울증의 핵심 증상인 무쾌감증(anhedonia)과 병적 생산성(Pathological productivity)의 신호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무쾌감증은 과거에는 즐거움을 느끼던 일에서도 더 이상 흥미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조지프 박사는 흔히 말하는 번아웃과 고기능 우울증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도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번아웃은 업무나 돌봄 등 특정 스트레스 상황과 관련돼 있으며, 휴식을 취하거나 환경이 바뀌면 증상이 호전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고기능 우울증은 직장을 옮기거나 충분히 쉬어도 공허함과 우울감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 ‘피플 플리저’ 성향이 우울을 가릴 수도
조지프 박사는 고기능 우울증 환자들에게서 과도한 자기희생과 타인의 기대에 지나치게 맞추려는 성향이 자주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대개 “내가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다른 사람의 부탁은 쉽게 거절하지 못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힘들 때는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다.
조지프 박사는 “다른 사람을 위해 끊임없이 역할을 수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된다”며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보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역할만 남게 되는 경우를 고기능 우울증 환자들에게서 자주 본다”고 말했다.
● 과음·과소비·스마트폰 과몰입도 경고 신호
이 같은 상태가 장기간 이어지면 정신 건강뿐 아니라 신체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조지프 박사는 치료받지 않은 고기능 우울증이 지속되면 극심한 피로와 탈수, 흉통, 신체적 탈진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어떤 사람들은 뇌는 여전히 버티고 있지만 몸이 먼저 한계에 도달해 응급실을 찾기도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또 일부는 내면의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과음이나 약물 사용, 과소비, 도박, 스마트폰 과몰입 같은 방식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이런 행동으로 스스로를 달래려 한다”고 말했다.
● “거절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늘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는 데 익숙해져 있다면, 작은 경계부터 세우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조언도 나왔다.
조지프 박사는 “주말에 일을 하지 않으면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부탁을 거절하면 최악의 상황이 실제로 일어날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많은 사람들이 경계를 세우기 시작한 뒤 오히려 더 존중받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다”며 “처음에는 불편하겠지만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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