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생산한 레드백 장갑차(사진) 대신 독일 라인메탈사의 제품을 도입할 전망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제공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5개월 뒤인 2022년 7월, 폴란드가 엄청난 규모의 한국산 무기 구매를 발표하면서 이른바 K-방산은 대한민국의 신성장동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냉전이 끝난 뒤 빠른 속도로 군수산업을 축소한 유럽과 달리, 북한과 대치하던 한국은 다양한 무기체계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면서 규모의 경제로 가격과 군수지원 경쟁력도 우수한 방위산업 구조가 육성됐다.
납품 속도로 동유럽에서 주목받은 K-방산
주로 미국·유럽에서 무기를 구매하던 폴란드가 과거 거래 전력이 없는 한국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전차와 자주포, 다연장로켓, 전투기를 구매한 것은 우수한 성능과 합리적 가격, 무엇보다 미국·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납품 속도 때문이었다. 폴란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4월 미국과 250대 규모의 M1A2 전차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대당 약 270억 원으로 구매한 이 전차는 계약 후 약 3년이 지난 올해 1월에야 첫 물량 28대가 인도됐고, 내년 말쯤 인수 작업이 끝날 예정이다. 이에 반해 K2 전차는 2022년 8월 계약, 12월 초도 물량 인도, 올해 11월 180대 전량 납품이라는 경이적인 속도로 공급됐다. 가격은 M1A2보다 쌌고, 성능은 대등 이상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K-방산의 압도적 가성비와 빠른 납품 속도는 러시아발(發) 전쟁 위협으로 불안에 떨던 폴란드를 진정시키는 데 1등 공신이 됐다. 심지어 한국은 높은 수준의 무기 기술을 적극 이전하며 폴란드 방위산업의 자립까지 도왔다. 이는 미국·유럽 방위산업이 제공할 수 없는 이점으로 현지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폴란드뿐 아니라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한국산 무기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최전선 국가인 루마니아도 K-방산에 주목했다. 루마니아는 러시아와 직접 국경을 맞대지는 않지만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와 인접해 있고, 러시아군이 주둔 중인 미승인국 트란스니스트리아와도 붙어 있다. 루마니아는 나토에 가입한 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아직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 옛 소련 규격 무기들을 주력으로 사용해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옛 소련 규격 무기 상당량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루마니아는 무기 공여로 발생한 전력 공백을 채우고, 군사력을 나토 표준에 맞춰 현대화하고자 재정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전차와 장갑차, 야포 등 대량의 무기를 도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
폴란드만큼은 아니지만, 루마니아의 무기 도입 수요도 꽤 큰 편이다. 노후화된 TR-85 계열 전차를 대체하기 위해 최소 200대 넘는 신형 전차를 도입할 예정이고, MLI-84 장갑차를 대체하고자 300대 이상의 신형 장갑차, 구형 견인곡사포를 대체하고자 신형 자주포 사업과 다연장로켓 도입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K-방산은 루마니아 지상군 현대화 사업을 거의 독식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3월 4일(현지 시간) 유럽 재무장 계획을 27개 회원국 정상에게 제안했다고 밝혔다. 뉴시스노르에이 수주 불발 또 반복되나
국제통화기금(IMF) 통계 기준 루마니아의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39위 수준이고 국방예산은 올해 85억5000만 유로(약 14조5000억 원)에 불과하다. 루마니아는 제한된 예산으로 성능이 뛰어나면서 납품이 빠른 무기는 물론, 높은 수준의 기술이전까지 제공받아 루마니아 현지에서 생산할 수 있는 무기 시스템이 필요하다. 자연환경도 방산 선진국인 미국·유럽과는 다르다. 루마니아에는 거대한 카르파티아산맥이 있고, 국토의 60% 이상이 산지와 구릉지다. 큰 강과 중소 하천, 오래된 다리가 많아서 미국·유럽의 60t대 전차나 50t대 장갑차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어렵다.
이런 루마니아에 한국산 무기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K2 전차는 경쟁 모델인 미국산 M1A2 SEP(v)3나 독일산 레오파르트 2A8보다 5~10t 가볍고 가격도 3분의 2 수준이다. 화력·방어력·기동력 모두 경쟁 모델과 대등 이상의 성능을 갖췄다. 레드백 장갑차 역시 경쟁 모델인 독일산 KF41 링스보다 3~8t 가볍고 가격이 싼 데다, 기술이전 조건도 좋다. 무기체계 자체만 놓고 보면 한국산 무기체계는 루마니아에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다.
그런데 11월 13일(현지 시간) 루마니아가 차세대 장갑차로 독일 라인메탈의 KF41 링스를 선정하고 계약을 체결했다는 블룸버그 보도가 나왔다. 루마니아 장갑차 사업에서 레드백을 이긴 KF41은 2년 전 호주 장갑차 사업에서 레드백에 패한 바 있다. 사실 KF41은 가격·성능·기술이전 등 모든 면에서 레드백에 미치지 못했고, 앞서 소개한 루마니아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할 때 레드백보다 경쟁력이 떨어졌다. 블룸버그 보도 일주일 뒤 루마니아 정부는 KF41 링스 선정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독일이 계약을 체결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할 수 있었던 자신감의 배경에는 ‘유럽연합(EU)’이라는 뒷배가 있었다.
루마니아 장갑차 사업은 유럽안보조치(Secure Action for Europe·SAFE)로 마련되는 1500억 유로(약 254조3300억 원) 자금 중 루마니아에 할당된 166억8000만 유로(약 28조3300억 원)의 일부를 사용해 추진되는 사업이다. EU가 마련한 SAFE 자금으로는 EU 회원국이 생산한 무기만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EU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독일로서는 이 사업을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국 정부도 10월 하순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을 특사로 파견해 이재명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고,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도 루마니아에 가서 레드백 장갑차의 루마니아 국산화율을 70% 이상까지 높여 SAFE 조건을 충족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루마니아 현지 언론은 여전히 독일 장갑차의 사업 수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어 이 같은 상황을 뒤집으려면 독일의 영향력을 무력화할 수 있을 만한 파격적인 제안이 필요한 실정이다.
한국은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노르웨이는 2023년 2월 독일 레오파르트 2A7NO 모델을 차기 전차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노르웨이 육군과 군비청은 K2NO 전차가 가격·성능·납기 모든 면에서 레오파르트 2A7NO를 이겼다는 보고서를 작성해 국방부에 제출했지만, 노르웨이는 독일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정치적 논리로 독일산 전차 구매를 결정했다. 노르웨이 군부는 이에 대한 반발로 전차 선정 발표 기자회견을 보이콧했지만, 어쨌든 승자는 독일이었다.
이는 EU 안에서 독일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이후 회원국이 27개로 줄어든 EU에서 독일은 전체 분담금의 24%를 내고 있는 최대 기여국이다. 유럽의회 의석 705석 가운데 96석이 독일 몫이다. 이런 독일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재무장을 선언하고 탈냉전 시기 축소했던 방위산업을 대대적으로 확충하면서 다른 회원국들에 독일산 무기를 사라는 압박을 가하고 있다. EU 밖에 있는 한국이 유럽 무기시장을 뚫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이유다.
사우디아리바이가 미국 F-35 전투기를 구입하기로 하면서 KF-21 전투기(사진) 수출이 사실상 무산됐다. 동아DBK-방산 사우디 수주전 뛰어들었지만
정치적 배경 때문에 무기 수출이 어려워진 곳으로는 K-방산의 또 다른 주요 고객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다. 사우디는 천궁-II 방공시스템, 천무 다연장로켓, 타이곤 장갑차, 현궁 대전차미사일 등 여러 종류의 한국산 무기를 구매한 나라다. 노후 전차를 대체하고자 최소 800대 이상을 도입하는 차세대 전차 사업을 추진 중이고, 해공군력 강화를 위해 신형 호위함과 잠수함, 스텔스 전투기 도입도 준비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도 사우디의 이러한 움직임에 맞춰 매우 적극적으로 수주전에 뛰어들고 있다. K2 전차와 K9 자주포의 현지화 버전을 제안하는가 하면, 구축함·호위함·잠수함 판매와 현지 건조 계획도 내놓은 상태다. 사우디는 이스라엘의 견제로 F-35 도입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KF-21 공동개발과 현지 생산에 관심을 보였다.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군사력 현대화와 현지 방위산업 육성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만큼, 빠른 납품과 높은 수준의 기술이전을 제공하는 K-방산은 사우디에 가장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미국이 입장을 바꿔 사우디에 F-35A 전투기를 팔기로 한 것이다. 미국은 11월 18일 사우디를 20번째 주요 비(非)나토 동맹국으로 지정하고 사우디에 대한 무기 판매 절차를 간소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와 함께 F-35A 최대 48대, M1A2 전차 300대를 사우디에 판매한다는 발표도 나왔다. 사우디는 이미 M1 계열 전차를 대량 운용하는 나라라서 M1A2 300대 판매는 별다른 문제없이 진행될 것이다. 이는 K2 전차 수출이 어렵게 됐다는 의미다. 사우디는 이미 구매하기로 한 130여 대의 MQ-9 무인공격기와 패키지로 미국 제너럴아토믹스의 협력전투기(CCA) 200대에 대한 구매 협상도 진행하고 있다. 이 무인전투기는 F-35와 연동해 사용하는 무기라서 이 거래 전체가 엎어지지 않는 이상 사우디와의 KF-21 협력은 어렵게 됐다.
유럽 조선소 두드리는 사우디
군함 수출에도 적색등이 켜졌다. 한국산 호위함 도입을 알아보던 사우디는 10월부터 독일 TKMS 조선소와 메코 A-200 파생형 호위함 도입 문제를 놓고 협의를 시작했다. 한국은 2월 방사청·HD현대중공업·한화오션이 원팀 구성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사우디에 호위함 및 잠수함 판매를 추진했다. 그러나 한국형 구축함(KDDX) 사업을 놓고 업체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일부 업체가 사우디에 단독 제안을 내놓으면서 이 원팀은 사실상 무산된 상황이다.
한국산 호위함에 관심 있던 사우디가 유럽 조선소 문을 두드린 것은 한국 기업들과는 일명 ‘알 야마마(Al-Yamama)’로 불리는 거래가 어렵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현재 사우디 공군 주력 전투기 중 하나인 토네이도 전투기를 구매할 당시 아랍의 키신저로 불리던 반다르 빈 술탄 왕자는 이 거래를 중계하고 10억 파운드(약 1조9300억 원) 뒷돈을 받았다. 전투기 가격을 몇 배로 부풀린 뒤 업체로부터 리베이트를 받는 방식이었다. 이는 2010년대 진행된 대규모 미국산 전투기·헬기 구매 사업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우디는 F-15SA·SR 전투기 사업에서 94억 달러(약 13조7800억 원), UH-60M·AH-6i 헬기 사업에는 150억 달러(약 21조9900억 원) 더 비싸게 계약했다.
사우디는 국가 재산인 석유를 판매한 기금으로 특별회계를 편성해 무기를 사는데 이 과정에서 비용을 부풀린 뒤 그중 일부를 왕족이 리베이트로 챙기는 관행이 있다. 보편타당한 시각에서는 명백한 불법이지만 사우디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 관행을 국내법으로 처벌하려 하면 사우디 시장을 개척·확장하기 어렵다. 실제로 사우디는 2006년 영국 중대비리조사청이 토네이도 전투기 리베이트 사건을 수사하자 영국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의 지시로 수사팀이 해체되기도 했다.
K-방산은 뛰어난 성능과 합리적 가격, 빠른 납품으로 세계시장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제는 제품 자체 경쟁력만으로는 시장을 확장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무기 하나를 팔려고 해도 판매 대상 국가와 정치·경제·안보 등 포괄적 협력이 필요하다. 신냉전이 격화하면서 ‘같은 진영’ 또는 ‘같은 블록’에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하는 시대가 됐다. 무기 거래는 반드시 청렴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원칙도 조금은 내려놓아야 한다. 이미 K-방산 상품과 기업은 세계시장을 휩쓸 경쟁력을 갖췄고, 출전 준비도 돼 있다. 이제는 정치·행정·외교 영역에서 변화와 유연성을 가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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