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관세전략 전환 조짐…품목관세 시대 올까 [트럼피디아]〈47〉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0월 26일 08시 00분


24일(현지 시간) 아시아 순방길에 오른 트럼프 대통령. 워싱턴=AP 뉴시스
24일(현지 시간) 아시아 순방길에 오른 트럼프 대통령. 워싱턴=AP 뉴시스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국과 세계 각국의 관세 협상이 열릴 전망이다. 다음달 5일에는 상호관세에 대한 연방대법원 첫 심리가 예정되어 있다. 조만간 관세의 장바구니 물가 반영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4월 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상호관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 닉슨 쇼크, 관세를 협상카드로
미국이 무역 상대국과 협상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관세를 부과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 15일 TV 담화를 통해 중대 발표를 했다. 일요일 밤의 깜짝 발표였다. 그는 금태환 중지, 임금과 가격 90일 동결, 수입품에 대한 할증(surcharge) 10%의 임시 부과를 즉각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닉슨 대통령은 “무역 상대국의 불공정 대우를 시정하겠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미국산 제품의 경쟁력 열세를 완화하고, 협상에서 상대국의 통화 절상과 시장 개방을 받아내기 위한 조치였다.

미국은 앞서 1930년 전 세계를 상대로 고율관세를 부과했다.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무역 상대국의 보복 관세 부과로 이어지며 글로벌 경제에 큰 상처를 안겼다. 유럽의 정치 불안과 독일 나치당의 부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닉슨의 발표가 해외엔 큰 충격을 안겼다.

*1930년 스무트-홀리법 시행으로 인한 파장은 트럼피디아 17화에서 다뤘다.

그런데 미국 국내 여론은 닉슨 대통령의 발표를 환영했다. 발표 다음 날 뉴욕타임스(NYT) 사설은 “대통령의 대담함을 주저 없이 환영한다”고 썼다. 싱크탱크 카토연구소는 여론도 호의적이었다고 전했다.

미 증시는 ‘닉슨 랠리’로 화답했다. 다우존스 지수는 하루새 3.85%(32.93포인트) 뛰었고, 월가에서는 “닉슨 행정부가 건설적인 정책을 내놨다”는 평가가 나왔다.

여론은 백악관이 경제 해결책을 내놨다는 측면에서 기대를 걸었다. 1971년 미국 경제는 초기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우려가 컸다. 그해 여름 물가는 4% 중후반, 실업률은 6% 안팎을 기록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호황이 끝나고, 베트남 전쟁 비용의 부담이 커지고 있었다. 고정환율 속에서 해외에 풀린 달러가 미국의 금 보유량을 넘어섰고, 경상수지 적자도 누적되던 상황이었다. 환율과 무역을 시정하고, 물가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닉슨 대통령의 구상이 호응을 얻은 배경이다. 또 정책 패키지가 협상 결과에 따라 종료될 임시 조치라는 점을 강조해 스무트-홀리법과 다르다는 인식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 신속한 합의와 닉슨의 정치적 승리
이듬해 닉슨은 재선을 앞두고 있었다. 결론부터 살펴보자면 닉슨은 재선에 성공했다. 깜짝 발표 4개월 만인 1971년 12월 18일 스미소니언 합의에 도달한 후 이틀 뒤 할증을 공식 종료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 주요 10개국(G10) 국가는 금 가격을 올려 달러를 절하하고, 각국 통화를 달러 대비 절상하기로 했다. 합의 이틀 뒤 수입 할증도 종료됐다.

미국 여론은 합의를 반겼고, 이듬해 경제는 괜찮았다. 1972년 국내총생산(GDP)는 전년 대비 5.3% 증가하며 강하게 성장했고, 실업률은 1972년 1월 5.8%에서 11월 5.3%로 떨어졌다. 1972년 소비자물가지수(CPI) 연간 상승률은 3.3%로 인상 폭이 완화했다.

국제 통화 질서 변화를 더이상 피하기 어렵다는 경고음이 나오던 상황에서 미국이 10%의 수입 할증이라는 강한 압박을 가하자 스무트-홀리법의 악몽을 피하고자 신속한 합의에 도달했을 가능성도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에 따르면 1930년 스무트-홀리법 시행 후 보복관세가 연쇄적으로 부과되며 세계 총 무역액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닉슨 쇼크’ 이틀 뒤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재무장관은 폴 볼커 미 재무차관과 면담에서 “고정환율 원칙을 유지하지 못하면 1930년대의 혼돈과 보호무역으로 돌아갈 위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 상호관세에서 품목관세로 전환할까
트럼프 행정부는 4월 2일 발표한 국제비상경제권법(IEEPA)을 근거로 한 상호관세로 협상 지렛대(레버리지)를 극대화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 상호관세에 100% 의존하는 건 아니다. 무역확장법 232조를 활용해 철강, 알루미늄, 자동차, 구리 등에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상호관세에서 품목관세로 무게추를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상호관세에서 수십개 품목을 면제하고, 개별 무역협정 체결국에도 일부 품목의 관세 적용 면제를 허용했다. 미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원자재에 대한 관세 면제도 추진할 계획이다. 관세 여파를 버티던 기업들이 가격 인상을 더 이상 미루기 힘들다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물가 방어를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반면 품목관세는 확대하는 모양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달 들어 트럭, 의약품, 가구에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달에는 금, LED 조명, 일부 광물과 화학제품, 금속제품 등 수백개 품목을 ‘부록2’로 정리해 상호관세를 면제하는 대신 232조에 따른 관세를 적용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상호관세를 활용해 속도전을 벌이던 트럼프 행정부가 법적 안정성이 확인된 232조 확대 적용을 위한 작업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소식통들은 품목관세가 연방대법원에서 상호관세 위헌 판결이 날 가능성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여겨진다고 WSJ에 전했다.

232조는 상무부가 국가 안보 위협 여부를 조사해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하는 절차를 밟아야 해 상호관세에 비해 속도가 느리다. 하지만 소송으로 무효화될 가능성이 작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미 집권 1기 때 이 조항에 근거한 철강 관세가 법원에서 문제가 없는 것으로 정리됐다.

232조에 따른 관세 적용 품목과 세율을 촘촘히 설계해 동맹과 맞춤형 협상에 나설 수도 있다. 이 경우 생활 물가에 가는 타격도 제한된다. 제시 크라이어 조지타운대 법학교수는 지난달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의회교류센터(KIPEC) 행사에서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른 품목 관세를 충분히 광범위한 분야에 적용하면 IEEPA에 따른 상호관세와 동일한 결과를 달성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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