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권성우/치열한 '장인정신' 그립다

  • 입력 2003년 7월 11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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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내 인생의 영화’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세 편 정도의 영화를 꼽는다면 나에게는 ‘정복자 펠레’ ‘비정성시(悲情城市)’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가 바로 그러한 칭호에 부합하는 마스터피스에 해당된다. 인생이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되는 순간, 혹은 뭔가 새로운 충전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나는 이 영화들을 다시 보곤 한다.

▼세월도 거스르는 ‘名作의 감동’▼

며칠 전에는 20여년 만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미삭제 디렉터스 컷 DVD가 출시되어 오랜만에 ‘내 인생의 영화’를 다시 감상하는 기회를 가졌다. 영화와 감독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는 4시간 반 동안 나는 내내 행복했다. 애초에 약 229분 분량으로 제작되었다가 1984년 개봉 시 흥행을 고려한 제작사의 이해관계로 인해 거의 절반가량이 잘려나간 채로 상영되어 이 작품의 진가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었다. 1990년대 중반 210분 분량의 비디오가 출시되어 이 영화는 명예를 회복했지만 감독은 이미 세상을 뜬 이후였다. 이제 영화가 개봉된 지 20여년이 흘러 세르조 레오네 감독이 편집한 필름 그대로를 우리가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몇 년 만에 본 영화는 또 다른 느낌의 서늘한 감동을 선사했다. 이 영화가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진가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공백을 두려워하지 않는 감독의 ‘여유’와 철저한 ‘장인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Once upon a time in the West)’ 등의 수작 등을 통해 서부영화의 문법을 근본적으로 변환시킨 레오네 감독은 결코 자신의 명성에 자족하지도 않았고 편승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는 다음 작품을 위해 오랜 시간의 준비와 기다림을 견뎌 왔던 것이다. 10여년에 걸친 공백의 시간 동안 그는 정말 철저하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준비해 왔고 마지막 생의 열정을 이 영화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는 당시로서는 실패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세상을 떴다. 그러나 시간은 결국 그의 손을 들어 주었다. 결국 이 영화는 ‘대부’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는 마피아 영화의 고전이 되었다.

과연 DVD에 수록된 레오네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가 얼마나 치열한 장인정신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역력히 인식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영화사상 대본을 쓰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작품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아울러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미 몇 년 전부터 영화음악의 귀재 엔니오 모리코네와의 지속적 교감을 통해 영화음악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음악 자체의 매력만으로도 이 영화는 기억되고 있다.

나는 지금의 문화판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 바로 이러한 ‘장인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적 완성도를 위해 공백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유와 끈기, 오랜 시간 동안의 잊혀짐을 감수하면서도 단 한편의 작품을 위해 생의 모든 것을 거는 장인정신이 정말 너무나 그립다. 최근에는 영화판이고 문학판이고 간에 너무나 많은 작품들이 너무나 쉽게 양산되고 쉽게 의미 부여되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예술은 없고 속도전 경쟁만 ▼

문학 쪽을 예로 들면, 이제 다음 작품을 치밀하게 준비하기 위해 3∼4년의 여유와 공백을 갖는 작가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속도전 경쟁을 하듯이, 혹은 한시라도 자신의 이름이 잊혀질까봐 계속 작품을 양산하는 구조 속에서 과연 진정한 마스터피스가 탄생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 시대의 영화와 소설들이 좀 더 오랜 세월을 견뎌내는, 그리하여 종국에는 시대와 역사를 가로지르는 예술적 승리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이 부박(浮薄)한 속도전에 저항하면서 철저한 장인정신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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